최규하.
(한자: 崔圭夏, 출생: 1919년 7월 16일 ~ 사망: 2006년 10월 22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10월 26일에 김재규의 총에맞아 유명을 달리한 뒤 곧바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약 한달정도 맡은 후,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1980년까지 약 8개월간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대통령직을 역임했던 인물이고, 또한 역대 대통령중 이승만 대통령 다음으로 영어를 잘했다고 알려져있는 대통령입니다.
생애.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유년시절부터 한문을 배워 원주학교 (현 원주초등학교) 에 월반입학을 하게되고, 이후 16세의 이른나이에 부모님에 의해 결혼하게 되면서 동시에 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소재지의 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참고할 점은 이후에 권한대행을 맏게되면서 만나게되는 국회의장에 민관식, 대법원장에 이영섭은 해당 서울에 있는 소재지의 같은 고등학교 출신입니다) 고교졸업 후인 1941년 즈음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되는데, 일본의 한 사범학교에서 영어학을 전공하게 되고, 해당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1943년 즈음에 건너가게 되며, 해당 중국에 있는 학교를 입학 후 졸업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5년, 경성사범대학 (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에 교수로써 일하게되고, 1946년에는 조선미육군군정청 (1945년 일본패망 후 1948년까지 한국을 관리했던 군대) 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1947년에는 한 행정처에 실장이 되기도 하는 등, 1948년에는 농림부의 국장이 되기도 합니다. 국장이 되는 1948년 즈음인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적인 한 회의에서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되는데, 영어학 전공답게 당시의 최규하는 영어에 능통했던 나머지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변영태' 라는 사람으로 인해 국제회의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이후에 최규하는 외교관이 됩니다.
공직자.
외무부에서 공직생활을 할 당시, 일본에서 한국영사로 취임하고, 이후에 열린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도 참석하는 등 활발하게 공무원으로써 역할을 수행합니다. 외무부 장관 시절에는 직접 외국을 다니면서 능통했던 영어를 바탕으로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뛰어난 실력을 나타내기도 했다고 하고, 또한 '3.15 부정선거' 에 연루되는 등 여러 일들을 겪게 되기도 하면서 결국 '4.19 혁명' 후, 약 한달 뒤 외무부에서 물러나기까지 하지만 이후에도 군사정부에 참여하게 되면서 말레이시아의 대사로 활동하기도 하고, '아시아 반공연맹' 에 참석 등을 거치며 외무부 장관으로 다시금 복귀하게되어 박사학위 등을 받습니다.
1971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를 담당하게 됨으로써 이듬해 북한을 시작으로 아프리카를 포함, 이란 등 20개국이 넘는 나라에 다녀오기도 하고, 1976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무총리로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안보회의, 한미정상회담 등에 참석하기도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에 일어나게 되는 일명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맞아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 사건' 으로 인해, 당시의 최규하는 대통령 직무대행을 대신하면서 동시에 "계엄령 (비상사태 등에서 군사령관이 사법권을 행사)" 을 선포하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였습니다. (동시에 군인이였던 전두환은 계엄사령부의 본부장으로 임명되는 시기입니다) 직무대행을 맡으면서 최규하는 당시에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등이 번지기도 했지만 최규하는 이를 신경쓰면서도 동시에 10월 26일에 일어났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시해사건 수사에만 집중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최규하.
최규하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합니다. 또한 윤보선 전대통령이 '정치범 석방' 과 관련하여 최규하에게 석방을 요구하게 되지만 이에관한 여부에는 답을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고, 사실상 박정희 전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을 했던 일명 "통일주체 국민회의 (유신헌법의 핵심이었던 대통령의 '선거 기능' 을 간접적으로 담당하던 기관, 박정희 전대통령이 암살되고 나서도 후임 대통령인 최규하와 전두환을 형식적으로 선출해주는 역할을 맡은 뒤 '제 5공화국 헌법' 발효와 함께 해체됨)" 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에 용납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이어진 대학생들의 시위, 서울에서 열린 집회, 비판 등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무소속이었던 최규하는 약 90% 가 넘는 득표율로 1979년 12월 6일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게 됩니다.
그렇게 최규하는 12월 21일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일명 "12.12 군사반란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축이었던 '하나회' 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허가없이 정승화, 정병주, 장태완 등을 체포한 사건을 통칭)" 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해당 '12.12 사태' 와 관련해서는 다음 포스팅 주제의 인물인 '전두환 편' 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최규하는 대통령이 되는데, 공직생활 당시의 최규하는 본인의 세력 및 파벌을 형성하지 못했고, 정치적인 기반 역시 취약했으며 허수아비 대통령으로써 그의 권력정도가 상당히 미흡했다고 하고, 실속 및 실권도 없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인해 하나회의 주축세력이 사실상 정부의 권력을 잡게되는데 이때부터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면서 동시에 1980년 7월에는 '김정렬' 이라는 군인이 하나회의 요청을 받아 단독으로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와 관련해서 몇시간에 걸쳐 독대까지 하게되고 그 결과, 그해 8월 최규하는 집권한지 약 8개월만에 대통령직에서 결국 물러나게 됩니다. 퇴임 후, 한 사단법인에 명예의장이 되기도 하고,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의 고문에 추대되기도 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가던 중,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는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향년 87세의 나이로 최규하 전대통령은 서울대 병원에서 서거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중 재임기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입니다. 대통령 재임시절보다, 취임 전 공직자일때 정보가 훨씬 많더군요. 정리하면서 놀라웠던점은 월반입학을 했다는것과 이른나이에 했던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부러웠던점은 영어에 능통했다는 부분인데, 저 또한 영어과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공부를 이따금씩 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해서 실력이 좋은것도 아닙니다만..) 필자는 공식적인 국제회의 이런데 참석할 기회도 없거니와 참석한다해도 능수능란하게 영어로만 구사할 자신이 없습니다 ^^;, 아무튼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어찌됐든 이승만 대통령 다음으로 영어를 잘했던 대통령이었던것도 모자라 검소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서거하기 전까지 연탄보일러만 사용하고, 신발이 닳면 덧대서 신고 다녔으며, 청와대에서 사용한 물건은 퇴임후에 사저로 가져와 계속 사용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무척 더울때 출산했던 최규하 대통령의 딸을위해 구매했던 선풍기도 서거하기 전까지 곁에두었다고 하고, 달력의 뒷면은 이면지로 활용하면서 또한 이쑤시개는 닦아가면서 계속 재활용을 했다고 합니다. 해당 최규하라는 대통령을 정리하면서 느낀점은, 어떠한 비리나 연루없이 청렴하면서 그의 검소하기까지한 부분을 본보기로 하여 따라가야함이 마땅하지않나 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됩니다. 폭우 및 비를 동반한 강한바람에 주의하시길 바라겠고,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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