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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전두환 편)

전두환.

원래는 육군 군인이였지만 전두환이 정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하나회" 를 경북출신인 동기들을 위주로 차례로 포섭하며 결성하고 "12.12 군사반란" 을 일으켜 박정희 전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조력자를 이유로 육군 총장이었던 당시 "정승화" 를 체포하여 국방부를 점령한 뒤, 이후에 사실상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 대통령 정부의 실권을 쥐게되면서 후에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다섯번째 대통령으로써 역임을 하게되는 인물입니다.

 

생애.

경상남도의 합천읍 내천리라는 농촌에서 일제강점기 시절이였던 1931년에 태어난 전두환은 이후 1936년 즈음에 대구로 이주하여 "호란보통소학교" 라는곳에 입학하여 다니게 되고, 그가 여덟살정도 되던 (1939년) 때에 전두환의 아버지인 "전상우" 씨는 당시 가난한 농부인 상태에서 같은 동네의 노름꾼에 빚보증을 서는 바람에 소유하고있던 땅을 담보하게되고, 담보잡힌 땅을 되돌리는 과정에서 일본순사의 소환을 받게되지만 전두환의 아버지는 숨어다니게 됩니다.

하지만 오래못가 그해 겨울에 결국 일본순사와 마주하게되는데 전상우씨는 일본순사를 절벽아래로 밀어버리고 중국으로 도망친 후 2년뒤에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탓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2년늦게 소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후에는 대구의 중학교에 다니게되는데 주목할점은 등, 하교를 모두 몇십km 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다니고, 또한 권투를 즐겨했으며, (권투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싸움하나는 정말 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집안의 형편이 넉넉치않아 배달등을 병행하면서 학업을 이어간탓인지 성적이 그리좋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195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생도생활을 하게되는데 훈련 및 특히 운동면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같은 육군사관학교의 동기로 후에 "하나회" 의 멤버가 되고 전두환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을 역임하게되는 "노태우" 와 만나 친분을 쌓게됩니다. (1959년에 전두환과 노태우는 미국으로 유학을 함께 가기도 하고, 이후 전두환은 군사관련 과정을 수료하면서 동시에 "ROTC" (4년제 대학 졸업 후 장교가  되는제도) 의 교관이 되기도 합니다.

 

5.16 군사정변 당시 전두환.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군사정변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급선무중 하나였던 "육군사관학교" 의 포섭을 하기위한 목적을 일환으로 박정희는 박창암, 오치성, 차지철을 육사로 보내게되고, 박창암 등은 군사정변을 옹호하는 시위를 육사의 생도들에게 부탁하게 되는데, 생도들은 교장 및 선배들과의 상의 후 여부를 알려야하는 상황이었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생도들은 해당 옹호시위를 따르지 않기로 했고, 이에 전두환은 육사 내부에 지인을 통해 이러한 거부의사 사실들을 알게됩니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육사 동기들과함께 육사로 찾아가게 되는데 실제로 당시 육사의 교장이었던 '강영훈' 이라는 사람이 학생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상태였고, 홀로 '육군 본부' 로 직접 찾아갔다는 강영훈을 전두환이 뒤따라 추적하게 됩니다. 본부로 찾아간 강영훈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옹호시위와 관련해서 학생들의 반대의 뜻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고, 뒤따라온 전두환이 "강영훈 교장이 학생들을 못나가게 해서 옹호시위가 불가능한 상태다" 라고 서로 상반되는 말을 하게되자,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의 말을 들어주었고 강영훈은 철창신세가 되고맙니다.

이후 생도들하고 동대문을 시작으로 시청까지 시가행진을 하게되는데, 군사정변을 앞장서서 옹호하며 시위를 한 덕분에 전두환은 "국가재건 최고위원회" 의 비서가 되고, 이듬해 1962년에는 권한대행을 맡은 박정희 대통령이 전두환을 국회의원과 관련하여 정계진출을 제안했지만 전두환은 군대에 남겠다고 거절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부터 전두환은 빠르게 진급하게 되는데 "한국 중앙정보국 (현 국가정보원)" 에서 '인사 이사' 가 되기도 하고, 군대 내에서 중령으로 계급이 오르기도 하는 등, 중령에서 대령으로 승급하기도 했으며, 부단장 및 대대장으로 임명되는 고공행진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1969년에는 육군 참모총장의 고문으로도 재직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

1970년에 전두환 대령은 "제 9보병사단 (현 백마부대)" 29연대의 사령관으로써 월남전에 참여하게 되고, 이듬해부터 베트콩 무장조직들을 박살내기위한 작전들을 펼치면서 차례로 제거해 나갔으며, 이러한 성과들로 인해 무공훈장을 받게됩니다. (베트콩 무장조직들을 타도해나가는 과정에서 몇몇 대원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 후, 1971년 그해 11월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제 1공수특전여단 (현 독수리부대)" 의 여단장으로 승급합니다. 또한 1976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안보 차장으로 있으면서, 1978년에는 육군 '제 1보병사단' 의 지휘관이 되고, 1979년에는 "국군 보안사령부" 에서 최고 지위인 보안사령관으로도 임명이 됩니다.

 

하나회.

1951년 전두환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을즈음 노태우, 김복동 등과 함께 영남이 출신인 친구들로만 5성회를 처음 결성하게 되는데, 후에 육사 동기들이 추가가 되면서 칠성회가 되고, 결국 "하나회" 라는 이름의 비밀조직이 됩니다. 해당 하나회에 들어가려면 3가지 전제조건이 따르는데 첫번째가 "조직내에서 합의된 명령에 복종하는것", 둘째가 "조직 구성원들과 경쟁하지 않는것", 셋째가 "앞서 2가지의 조건에 불응시 인간으로써 행해지는 어떠한 수치심도 감수할 것" 입니다.

또한, 조직 내 구성원들은 승급 등에 있어서 서로를 추천하고 밀어주는 등의 끈끈했던 조직력으로 인해 군대 내에서 하나회의 멤버들로만 중요했던 직위에 승급할 수 있었던것이 가능했습니다. 이 비밀조직은 체계적이고 엄격한 군대내에 존재했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하에 있었기 때문에 결성했을 당시와는 다르게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해지는 조직으로 확장해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서 하나회 멤버들이 차례로 정리되면서 사실상 조직이 해체 (?) 가 됩니다.

 

12.12 군사반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맞아 유명을 달리하자 전두환은 육사 생도들 및 하나회의 중요한 직위에 있던 멤버들과 함께 "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하나회가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없이 정승화, 정병주, 장태완 등을 체포한 사건을 통칭)" 을 일으킵니다. 해당 김재규의 저격사건 후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전두환에게 권한을 넘기게 되고, 권한을 넘겨받음과 동시에 전두환은 이후에 당시 거대권력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에 계엄사령부 설치를 명령하기도 하며, 사령부내 본부장으로써 '10.26 사건' 에 대한 수사를 맡게됩니다.

이후 김재규를 체포하고 면담과정에서 "당신은 반역자이니 어쩔수없이 죽을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김재규의 동생인 "김항규" 에게도 "군인 상관으로써 김재규는 존중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반역자라 어쩔수없다" 는 양해의 말을 전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1979년 11월 즈음부터의 전두환은 하나회 멤버들과 군사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논의하게 되고,  그해 12월 6일 군사반란을 진행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2월 12일날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김재규와 내통한 정승화를 체포 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게 되지만, 당시의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부의 의견' 을 이유로 전두환의 요구를 거부하게 되고, 이에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의 허가없이 합동수사본부의 대장인 정승화를 체포 및 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장태완까지 잡아들이게 되지만 과정중에 총탄이 오가는 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사령부 병사들이 사망하기도 합니다.

이로인해 전두환은 군대를 장악하게 되면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헌' 이라는 사람까지 잡아들이게 되지만 거사를 치르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정승화의 체포허가를 대통령에게 받기위한 목적으로 전두환은 전두환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 으름장까지 놓게 되지만 당시의 최규하 대통령은 생각보다 거절의사를 몇번이고 강하게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5월 18일날의 광주.

1980년 5월 17일에 전두환은 나라의 안정과 관련하여 하나회 멤버들인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의논을거쳐 '시국 수습방안' 을 이유로 전국적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게 되고, 동시에 '12.12 군사반란' 으로 인해 '중앙 정보부' 의 빈 자리를 전두환이 대신한 상태였으며, 국내 정보기관들을 점령 후 전두환은 시국 수습방안을 행하기 위해 '북괴 남침설' 이라는 내용을 작성하게됩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당시의 미 국무부 등에서 '남침을 한다는 근거가 없고, 그러한 정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판단하기도 했고, 후에는 결국 전두환이 시국 수습방안을 목적으로 북괴남침설을 조작을 했다는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5월 17일에 국회등이 군대에 의해 포위되고, 5월 18일이 되자마자 비상계엄이 퍼졌으며 당시의 김대중 및 정치인 등이 하나회 (신군부) 에서 생각하는 방해세력이라는 이유하에 영장없이 체포되게 됩니다. 이때 광주에서는 전남대의 학생들이 하나회 (신군부) 의 조치 및 김대중의 체포와 관련하여 항의시위가 일어났는데 시위의 정도가 심한 나머지 특전사를 동원하여 사태를 진압하지만 문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군인들의 폭력에 타겟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항이 거세졌고 학생 및 시민들의 피해도 덩달아 커져갔습니다.

시위대와 관련된 자극적인 내용을 내보낸 광주의 방송국을 시위대가 불을 지르기도했고, 시위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군대는 결국 총까지 꺼내들게 됩니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시위 및 진압은 어느새 이틀이 넘어가고 있었고, 이에 질세라 시위대는 급기야 파출소 등에서 무기고를 이용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으며, 무장 이후 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고 행정기관을 지배하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광주시내에서 상부의 지시로 퇴각한 군대는 일명 '광주 외곽봉쇄' 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이 시기엔 광주 외곽에서 마을버스 총격, 오인사격 등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계속되는 군인들의 집단발포 및 학생, 시민들의 사망, 구타 및 기나긴 대치, 공방전 끝에 시간은 흘러 5월 27일이 되던 날, 시민군 중 일부는 무장한 무기 및 폭탄 등을 스스로 반납하게 되지만 다른 일부는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가게 되고, 이를 이유로 군인에 의해 또 다시 사망하게 되며, 이후 저항하면서 남아있던 나머지 시민군들의 자진투항 및 진압을 포함한 시민군들을 강제로 연행함으로써 길었던 열흘간의 해당 '광주 5.18' 사태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게 됩니다.

 

대통령 전두환.

'광주 5.18' 사태 후 전두환은 권력을 잡을 목적으로 "국가비상대책위원회 (신군부가 내각을 장악하기 위한 임시기구)" 를 설치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국민회의 (유신체제 때 만들어진 기관)" 에 관련된 의원들로 하여 대통령이 됩니다. 하지만 군인이였던 전두환이 경제분야에 관하여 지식 등이 미흡했기 때문에 여러 전문가들을 불러 수시로 도움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1980년 9월 1일부로 정식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집권 초기부터 여러 업적들을 이루어 나가는데, 먼저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 (악화) 됨에 따라 180km를 초과하거나 453kg이상의 탄두미사일을 개발하지 않을것이라는 각서를 발표했고, 해당 약속을 받은 레이건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의 하나회 (신군부) 를 완전히 인정하기로 결정합니다. 또한 연좌제 (죄를 지은사람의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부여하는 제도) 를 폐지하고 비리정치활동 금지, 야간통행금지 해제 (해제했지만 야간에 발생하는 사고 등으로 인해서 다시 취소되게 됩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계획했던 "경제발전 5개년 계획" 추진, 아시안게임 개최, 올림픽 개최, 범죄 타도, 대통령 연임제 폐지 및 단임제 시행, 두발 자유화 (이 또한 반대로 인해 폐지되게 됩니다), 이산가족 상봉 추진, 등의 업적들이 있으며, 이와 반대로 군부독재자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고, 박정희 대통령때 추진됐던 핵개발 포기. (물론 이때당시 미국의 반대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일명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 (전두환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 미얀마에서 참배행사로 해당 묘소에 방문하기 전 북한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미리 대기중이던 내각장관을 포함하여 17명이 사살되는 사건, 4명의 버마정부 공무원도 사망)" 때 북한에 무력으로 보복하지 않았던 점 등이 아쉬운 예라고 들 수 있겠습니다. (후에 1984년에 일어났던 홍수피해에 관해 북한이 쌀, 의약품 등을 남한에 지원한 사실도 있습니다)

 

퇴임 후.

1988년 2월 24일, 고별행사와 동시에 전두환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서 퇴임 후 그해 3월에 노벨평화상 후보로 소개되기도 하고, 한 행정기관의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지만 비리와 관련하여 청문회장에 출석하게 되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구속을 염원하는 목적으로 학생들이모여 대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절에 들어가서 은둔하며 국회에 출석하는 등을 병행하다가 나중에는 시민들이 신군부와 관련해서 고발하는 일이 발생하고 '5.18 광주사태' 에 대한 재수사도 착수되게 되며, 후에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죄인신분으로 재판까지 받습니다. 이외에도 김영삼 대통령과의 충돌, 구속과 석방의 반복, 비자금 혐의, 알츠하이머 투병, 뇌물혐의 등등, 퇴임후의 전두환 전대통령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전대통령 만큼이나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정보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인물이라서 작성하는 내내 틀린정보는 없는지 찾아보고 또 찾아보고를 반복했습니다. 글을 써내려가면서 해당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 느낀점은 아무래도 "불같은 성격"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성격이 굉장히 강했다고 나와있더군요. 일제강점기 시절 어찌보면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일본순사를 전두환의 아버지가 절벽아래로 밀어버릴 정도라니, 실로 강심장도 이런 강심장이 아닐 수 없을것입니다.

어머니 역시 본인의 튀어나온 생니 몇개가 아들인 전두환의 앞길과 관련하여 긍정적이지 않다는 지나가던 한 승려의 조언으로 인해, 마취도 없이 전부 뽑아버렸다는 일화는 작성하는 내내 필자한테 강하게 다가오더군요, 추가로 전두환 대통령이 군인이었을 1978년 당시, 폭발음이 들렸다는 보고를 받음과 동시에 해당지역에서 "제 3땅굴 (한국을 침투할 목적으로 북한이 뚫어놓은 군사용 터널)" 을 발견했다는 정보도 나와있었습니다만, 아시안 게임, 올림픽 개최 등의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5.18 광주사태' 에 관한내용은 굉장히 안타까운 사안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당 사태에 관해서 "가짜 유공자", "사실을 위한 유공자들의 명단요구" 등의 논란도 있고, 현재도 수 많은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김대중 전대통령의 청와대 초청 및 병문안, 최규하 전대통령의 빈소 조문, 박근혜 전대통령의 취임식 참석 등 전두환이 대통령이었을 시절 이외의 모습들도 필자에게 있어서 다른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박정희 전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전두환 전대통령에 관한 내용이 더 있습니다만 글이 너무많이 길어질것같아 이만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시길 바라겠고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