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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박정희 편)

박정희.

(한자: 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일련의 경제정책을 시작하여 국가에 "한강의 기적" 이라고 알려진 급속한 경제성장 및 산업화를 가져왔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60년대와 70년대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 가장 인기가 있었지만 1971년부터 성장이 둔화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인기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이후 1972년 즈음에는 계엄령을 선포 및 "유신 헌법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 등을 일정기간 통제 할 수 있고, 국회를 해산 할 수 있는 권한 및 대통령 연임제가 가능한 법)" 을 통과시키는 등, (공식적으로 '유신 헌법' 은 일곱번째 헌법 개정안이었습니다) 새로운 공화국을 정당화 하기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 기간동안의 정치적 반대 등은 계속해서 억압되었고, 또한 언론과 군대를 완전히 통제했습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 관련해서 그를 시해하려는 시도에서 살아남기도 했지만 나중에 학생 및 주민들이 벌인 '부마 민주항쟁' 후에 1979년 10월 26일 본인이 임명한 중앙정보국 국장이었던 '김재규' 라는 최측근에 의해 결국 시해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와 12월 12일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로 인해 이후의 대한민국은 상당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덧붙여 박정희 대통령은 현대의 한국정치 담론에서 독재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한국인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입니다.

한강에서 기적을 일으키며 한국을 개편하고 현대화한 업적에 대해 일부사람들은 그를 인정하지만 타국인들은 국가를 통치하는 권위주의적 방식을 비판하고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명목하에 민중의 자유를 희생하면서 사회질서를 부여한것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2012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이 서울에서 오픈했고, 2013년 2월 25일 그의 장녀 박근혜가 한국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며, 2017년 3월 10일 장녀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2018년 4월, 총 2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합니다.

 

유년시절 박정희.

1917년 11월 14일 일제강점기 시절, 가난한 양반가정에서 다섯형제와 두 자매중 막내로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배운 그는 이후 1926년부터 구미공립보통학교 (현 구미초등학교) 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수재로써 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상당히 똑똑해서 재학내내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고 하고, 특히 반내에서 자주 반장으로 대표되어 학급을 이끌었으며 장으로써 친구들을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는 반면에, 이기적인 면도있었고 야심이 많았으며, 또한 한국에서 낙후된 가난한 시골지역에서 살아가야 하는데있어 불만의 태도를 자주 나타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시절 박정희를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가 버릇처럼 '시골에서 탈출하기를 원한다' 고 되풀이했던 말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인물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및 '이순신' 이고, 군인에 대한 동경이 늘 있었으며, 또한 그가 유년시절이었을때는 가정형편상 밥을 거를때가 많았는데 친했던 동급생중 한명의 집이 학교와 거리가 가까워 자주 신세 (?) 를 진 의리를 뒤로하지않고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고나서 해당 동급생을 찾아 '신세진 도리를 다했다' 라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통치하에 자란 사람으로써 박정희는 종종 옛 일본에서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 유신 (기존 일본의 체제를 타도해서 바꾸게 된 사건을 통칭)" 이후 일본의 빠른 근대화의 성공에 대한 존경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청년시절 대구에 있는 학교를 졸업한 후 문경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하게됩니다. 이후 만주학교에 지원을 하게되어 1차 탈락을 하고 혈서를 동반한 서류를 보내 2기로 합격하게 되는 박정희는 (이 기간동안 그는 일본이름인 Takagi Masao (高木 正雄) 를 사용) 시간이 지나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되고, 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황제한테 금으로 된 시계를 하사받는 등, 해당 학교의 일본인 강사들에게 재능을 인정받기도 합니다. 이후 보병 8사단의 부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산당을 응징하는데 일조하면서 동시에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 으로 인해 패망하기까지 근로를 하기도 하고, 1946년 즈음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한 사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합니다. (당시 사관학교의 동급생 중 한명은 그의 친한 친구이자 나중에 시해의 원인제공의 인물이 되는 '김재규' 입니다)

 

청년시절 박정희.

1936년 즈음의 박정희는 돌연 결혼을 하게되는데, 이는 당시 건강상 위중했던 아버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직접적인 간청으로 이뤄진 결혼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후에 위에 언급한대로 대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중이던 1937년 즈음에 장녀 '박재옥' 이 태어나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박정희의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참고로 보병 8사단 부대에서 함께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이라는 세명의 사람들은 이후에 일어날 군사 쿠데타 '5.16 군사정변' 의 멤버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박정희는 중국의 공산당 토벌과 관련해서 적지않은 논란 (이를테면 중국내에 주둔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숙청 및 학살 등) 들이 있지만 당시 박정희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토벌과 관련하여 '초임' 이었을때는 직접전투에 참가한건 맞으나 단기간에 높은 계급으로 진급하게되어 후에는 직접전투를 나가지 않았다고 신현준, 방원철 등이 증언했다는 자료도 나와 있었고, 또한 창씨개명과 관련해서는 '타카기 마사오' 라는 일본 이름을 한차례 사용한건 맞지만 두번째 창씨개명 등의 논란은 정확한 근거자료가 없어 '사실이 아니다' 라는 내용이 존재합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이후 박정희가 몸담고있던 보병 8사단 부대 또한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되고, 함께했던 전우들과 그해 9월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내의 군대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이듬해인 1946년 5월, 8개월만에 박정희는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한 후에도 한 사관학교에 다시 입학해서 단기로 졸업하고, 군대에서 소위로 군인생활을 이어나가면서 소령으로 진급하게 되는데 과정중에는 일명 "여수, 순천 사건 (이승만 정부에서 실시한 제주 4.3 사건과 관련해 진압을 목적으로 군인들을 파견하는데 해당사건의 진압을 거부하는 군인들에 의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 연루혐의 후 대한민국 군대내의 공산 주의자를 걸러내는 작업중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을 합니다. 무기징역에서 10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는데 나중에는 결국 "집행 정지" 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5.16 군사정변.

한국의 '권위 주의적' 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19일 혁명이후 하야한뒤에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 (제 2공화국) 가 1960년 8월 13일에 출범을 합니다. 그러나 이시기의 통치기간은 짧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에게 실권을 넘겨준 상태였죠. 이 새로운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하에서 10년간의 잘못된 관리와 부패로 고통받고 있는 경제와 이승만의 축출을 요구한 학생들의 어떠한 희망에 의해서 생겨났기 때문인데요, 기대에 미치치 못하자 시위대는 정기적으로 거리를메워 정치 및 경제개혁에 대한 수많은 광범위한 요구를 하곤했습니다. 안보는 악화되었고, 민주당은 오랜 진영의 싸움으로인해 이미 국민들의 지지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정과 분열을 배경으로 박정희는 당시 무능했던 민주당 세력을 제거하여 군정을 수립하기위해 여러 지인들을 비밀리에 섭외하기에 나섭니다. 섭외해 나가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군사 혁명위원회' 를 구성하게 되고, 이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이하 주축세력들은 한강을 건너 서울을 점령하는 과정중에 장면 국무총리가 수도원으로 도주하여 숨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도주한 장면 국무총리는 수도원에 은신하면서 미국에 사태진압을 요청했지만 강했던 의지의 박정희를 돌릴길이 없어 당시에 맥그루더 장군도 상황을 수습하지는 못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의 체념, 장면 국무총리의 도망 등이 '5.16 군사정변' 을 성공시키게된 제일 큰 요인이었으며, 여담으로 윤보선 대통령이 사퇴발표를 하자 박정희가 청와대를 찾아가 사퇴를 만류하는 '시늉' 을 했다는 웃픈 내용의 자료도 나와있었습니다.

덧붙여 '야인시대' 를 보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작중 나오는 인물인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등 정치 깡패들이 '이승만' 이 대통령이던 제 1공화국 시절이나 '장면' 이 국무총리였던 제 2공화국 시절과는 달리 '5.16 군사정변' 이 일어나게되자 이후에 과거에 있었던 모든악을 타도 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분으로 해당 정치깡패들은 시가행진을 하게되고, 육군 대원들에 의해 일명 "조리돌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벌)" 되면서 결국은 사형까지 당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난 때이기도 합니다. 추가로 북한에서는 '5.16 군사정변' 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남측에 이러한 사단이 날것을 미리 예측했다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

1963년 10월 15일 '제 5대 대통령 선거' 에서 윤보선을 제치고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되게 되는데, 대통령 당선전에는 권한대행으로써 윤봉길, 민영환, 김좌진, 김구,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을 추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재산을 기부한 후 장학재단을 설립했다는 자료도 있었고, 울릉도를 방문해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인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는 정보도 나와있었는데, 특히 권한대행 시기에는 전두환과도 사이가 각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윤보선 전대통령을 다음으로 대한민국의 세번째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우선, 미국의 요청으로 약 320,000 명의 한국군을 베트남 전쟁에 미국과함께 싸울 수 있도록 보내기도 했고, (목적은 미국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발전을 막아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것이 당시의 이유) 이후 1965년 1월 즈음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이 도움을 받는 수동적 입장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요 국제문제에 책임을 지는 적극적인 역할을 맡을 때' 라고 발표하기도 하지만, 이후에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정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을 토대로 배상금을 받아 경제발전을 이룩하기위한 목적)" 체결성공을 위한 추진을 하려했으나 당시 학생들과 야당의 반대가 심해서 데모가 일어나 해당사태를 진압 할 수 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목표 중 하나는 한국의 빈곤을 종식시키고 '민족 주의적' 인 방법을 통해 국가를 "제 3세계 경제 (빈곤한 나라)" 에서 "제 1세계 경제 (자본주의 나라)" 로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을 잡았을 초기에 한국의 1인당 소득은 미화 72.00 달러에 불과했지만, 이와는 반대로 북한은 발전소, 화학플랜트와 같은 중공업의 역사 및 소비에트와 같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로부터 받은 대량의 경제적, 기술적, 재정적 지원으로 인해 경제력과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훨씬 더 강했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참고할 점은,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군의 파견에 대한 재정적 인센티브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해당 인센티브는 미연방 정부에 의해 지불되었고, 그들의 봉급은 남한정부로 직접 송금되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중에 "새마을 운동 (지역사회 및 농촌의 개발)" 및 여러 업적들이 있지만 몇가지만 살펴보자면 1967년 서울에 '구로 공업단지' 를 조성하고 저렴한 철강을 공급하기 위해 '포항 제철소' 를 지었으며, '자동차 공장' 과 '조선소' 를 설립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번잡한 고속도로 중 하나가 되는 서울-부산 고속도로 (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1970년대에 마치기도 하고, 1975년에는 현대에서 최초로 '포니' 가 생산되기도 했습니다.

현대는 자동차 제조 및 건설 이외에도 시멘트, 화학 및 전자 산업으로 궁극적인 세계최대 기업 중 하나가 되면서 한국 산업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하에 비약한 발전을 보이게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빛나는 업적뒤엔 분명 그늘도 존재 했습니다. 몇가지가 있지만 일례로 노동에 대한 것인데, 당시 정부는 최저임금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시간 또한 12시간에 달했었습니다. 빛나는 업적과 어두운 그늘을 병행하면서 이후에 '제 6대 대통령 선거' 에서 윤보선을 또 다시 제치고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다음해인 1968년에 일명 "김신조 사건 (북괴 김일성의 명령으로 북한군 31명이 청와대를 습격)" 이 일어나게 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려는 북한의 암살부대로써 청와대를 습격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전원 사살당하고 나머지 2명은 도망간 것으로 간주해서 종료된 사건입니다. (혹 '실미도' 라는 영화를 보셨다면 김신조 이름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을것입니다) 무장간첩의 청와대 습격사건에도 한차례 위기를 넘기게 되면서 이후 1971년 '제 7대 대통령 선거' 에서 김대중을 제치고 다시금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계속해서 대통령 직무를 이어가게 되지만  1974년 즈음에 일어났던,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 가 피살이 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절관련 기념사중에 관객인줄 알았던 '문세광' 이라는 사람이 권총을 꺼내들어 대통령을 시해하려 했지만, 육영수 여사가 대신 총에맞아 숨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부인이 총에맞아 숨졌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을 계속 이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문세광에게 총기를 제공한 일본인도 공범으로 체포되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중에 일어났던 정말 유명하고도 속 시원한 사건이 하나가 있습니다. 1976년에 일어났던 일명 '판문점 도끼만행' 인데요, 판문점 근처에 있는 "공동경비구역 (군사 분계선간에 위치한 중요한 지역)" 에서 북한군이 미군 2명을 도끼로 해치고 다수의 한국군에도 해를입힌 사건입니다. 해당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곧바로 성명발표와 동시에 미군 전투기가 한반도로 즉시 날아왔고, 폭격기 및 항공모함까지 대한민국 인근 해역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에 가세해서 박정희 대통령 역시 보복작전의 일환으로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 이라는 희대의 명언과 함께 특전사 요원들을 투입해 북한초소를 파괴하게 됩니다.

이에 북한이 맞대응시 무력전으로 간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였으나 북괴는 어떠한 맞대응도 없어 무력전까지 번지지는 않았던 사건입니다. (이후 김일성은 해당 사건에 대한 유감성명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기도 하고, 농어촌 개발공사를 설치하여 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키며 집권 말기를 향해 다가가던 중, 1979년 10월 16일에 일어난 일명 "부마민주항쟁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 은, 그 시위에 대한 정도의 심각을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뒤 해당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되는 사태이기도 하였지만, 해당 항쟁이후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쯤에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에서 가수 등을 불러 연회를 하게되고, 연회도중 박정희 자신의 측근이었던 김재규의 총에맞아 유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후에
김재규는 재판에서 '유신 개헌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없어졌다. 유신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게 아닌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 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에는 미국측의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도 있으나 정확한 근거가 없기때문에 의혹인 채로 남아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유신 체제' 라는 단 한가지가 아닌 미처 알지못했던 다른이유도 있었나? 라는 마음이 개인적으로는 불현듯 스치기도 했습니다. (내부갈등 등) 아무튼 결국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제목은 분명 '한눈에 보는' 인데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나 생애나 기타 등등 정리해야할 내용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글이 좀 길기는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시는 분들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쟁 이후 불안정했던 대한민국 당시에 폐허가 되어버린 땅에서 굶주림에 의지조차 없었던 국민들을 배불려주고, 힘을 실어주고, 경제를 발전시켜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및 추진력, 강단 등 분명 존경을 받아야함이 마땅하지만 반대로 박정희 대통령의 어두운 부분도 분명히 존재하는건 사실입니다.

정리하면서 조금 놀라웠던 사항은 가난했던 시절에 신세진 보답을 뒤로하지 않았다는것이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훈장추서 및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수여, 총에맞아 쓰러진 육영수 여사로인해 정신을 바로잡고 있기가 힘든 상태였을텐데도 계속해서 연설을 이어 갔다는것, 판문점 도끼사건때 보여준 추진성있는 보복, 개인의 재산을 기부한 후 장학재단을 설립 등이 글을 써내려가는 내내 필자한테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일단 신세진 보답을 했다는것은 같은 남자가 보더라도 의리하나는 확실했던 사람이라 생각했고, 일본군에 맞섰던 독립운동가들과는 반대의 입장에서 팔로군 토벌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대비되긴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훈장을 추서했다는 것, 육영수 여사를 뒤로하고 연설을 이어갔다는 내용이 필자로 하여금 오히려 당시 관객들에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는것이 당시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했고, 도끼만행때 추진력있게 밀어붙인 보복은 그야말로 속시원한 부분이었습니다. (feat: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

 

워낙 불호가 정확하게 갈리는 분이라서 사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를하고 글을 작성하려 이곳저곳 알아보던도중 어떤곳은 박정희 대통령의 좋은 부분은 거의 빼놓고 단점만 부각시켜서 적어놓은곳도 있었고 다른곳은 장, 단점 모두 있는그대로 적어놓은곳도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부분의 기사나 자료들이 네거티브한 내용들 밖에는 없더군요. 정치관련 글을 작성하는 현재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중립을 지켜가며 써내려가야 함이 맞지만 해당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단점만 부각시키는 정보" 는 중립입장에서 보는내내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오히려 '단점만 부각시키는 정보' 에 대해서 반감이 생기더군요.

어찌됐든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중 전에없던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준 박정희 대통령으로 인해서 현재도 이렇게 밥을먹은 후 배부른 상태에서 이런글을 써내려 갈 수 있는게 아닌가하는 감사함이 들면서도 동시에 어두운부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결과가 '한강의 기적' 이니만큼 그래도 그 시절에 살기가 좋았다라는 말이 나오는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육영수 여사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도 총에맞아 유명을 달리하였지만 나라의 부흥과 국민만을 생각하며 풍족하게 해주신 공을 잊지않아야 하겠습니다. 글이 너무많이 길어진것 같습니다. (업적 및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내용이 더 있긴한데 글이 더 길어질것같아 이쯤에서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아무튼 정보를 찾아보는데있어 도움되시길 바라겠고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