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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노태우 편)

노태우.

정치인이자 군인이었던 그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전두환 전대통령 후임으로) 여섯번째 대통령으로써 역임을 하게되는데, 전두환 전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육사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며 동기이자 후에 일어날 쿠데타 및 군사반란에 전두환과 함께 동참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생애.

노태우는 지금의 대구 달성군 공산면 (경상북도) 이라는 곳에서 1932년 12월 4일에 태어났습니다. 이 지역의 면사무소에서 저임금 공무원으로 근무한 그의 아버지는 노태우가 여덟살이었을때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어린시절 부유하지 못했던 노태우는 7살즈음 대구의 한 소학교 (지금의 대구공산 초등학교) 에 입학하게 되는데 전두환 전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몇 km 나 되는 거리의 학교를 걸어서 다녔다고 합니다. (지도상에서 도보로 걸었을 시 못해도 5km 는 족히 넘는 거리였습니다)

졸업 후 삼촌의 도움으로 같은 대구의 소재지에 있는 학교 (현 경북고등학교) 로 입학하게 되는데, 그의 고등학교 기록은 그를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한 학생" 으로 쓰여져있다고 하고, 그리고 이때 (1950년) 일명, 6.25 전쟁으로인해 학도병으로써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에 투입되게 됩니다. 학도병이었을 당시 군사교육기관인 "헌병 학교" 에 입학하기도  했고, 본래 재학중이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해당 육사 동기인 "전두환" 과 이때 만나서 친구가 됩니다. 또한 육사에서 생도시절 전두환 전대통령이 운동면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낸것과 비슷하게 노태우 역시 스포츠를 좋아하여 럭비부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군인.

1955년 즈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후 이듬해 제 5보병사단 (현 육군 열쇠부대) 에 소대장이 되면서 동시에 같은 부대에 단장으로 있던 박정희 전대통령과도 가까워 지게되는 시기입니다. 이후 육군 학교 (현 충북 영동에 위치한 육군종합행정학교) 에 배치되어 종사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육사시절 동기였던 사람들과 함께 친목을 목적으로 모임 (북극성 회) 에 함께하고, "하나회 (혹은 신군부, 전두환 등 육군사관학교 동기들이 만든 비밀조직)" 의 멤버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두환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가 그곳에 있는 군사학교에서의 교육과정을 끝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한 대학교에서 영어와 관련된 장교로써 근무하게 되고 또한 "ROTC (육군학생군사학교)" 에서 교관으로 해당 학교의 예비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동시에 1961년에 일어났던 "5.16 군사정변" 당시 전두환 전대통령과 군사정변의 뜻을 같이하기도 하고, 시가행진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이후에 베트남 전쟁에도 참가하여 훈장을 받고, 귀국 후 육군에서 연대장을 보직받으면서 1974년 즈음에는 전두환 전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공수특전여단의 여단장으로 승급하기도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게되자 그해 12월 12일날 전두환 전대통령과 같이 일명 "12.12 군사반란 (전두환과 노태우를 포함한 하나회 (또는 신군부) 조직이 당시 대통령이던 최규하의 허가없이 평소 김재규와 가까웠던 정승화 등을 잡아들인 사건)" 을 일으키게 되고, 해당 조직 (신군부) 이 정부의 실권을 쥐게되는데에 있어 하나회의 멤버로써 일조를 하게됩니다.

이후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전두환 전대통령의 후임자리 (사령관 등) 를 꿰차기도 하고 정계에 입문하기도 하지만 전두환과의 관계가 그리오래 좋은사이로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참고할 사항이 노태우는 군인선배들에게 특히 예의가 발랐는데 그 중 "김종필" 이라는 사람이 노태우의 예우를 좋게보았고 이후 노태우에 대한 김종필의 조언, 특히 불같은 성격의 전두환을 대함에 있어서의 충고 등을 아끼지 않은탓에 노태우는 전두환과 사이가 좋지 않았을때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해당 노태우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던 전두환은 본인의 미래가 노태우로 인해 별탈없이 흘러갈것이라 생각했지만 노태우가 대통령이던 시절 전두환을 "백담사 (현 강원도 인제에 위치해있는 사찰)" 로 보내버리는 일이 일어나며 역풍을 맞기도 합니다)

 

정치.

1981년 즈음에는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여러 활동들을 하게되는데 먼저 당시의 여당 (민정당) 에서 위원으로써 당을 이끌기도 하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특사로 여러 국가를 방문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외교도 담당하며 위원장으로써 결국 1988년에는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일조하게 되는데 특히 이시기에 노태우는 전두환의 후임과 관련해서 당시 "노신영 (전 국무총리)" 이라는 사람과 같이 대통령 후보자리에 대치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13대 대통령 후보로써 선출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과정중에는 전두환 전대통령으로 인해 일어난 일명 "6월 민주항쟁 (군사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 시위가 일어났고, "6.29 선언 (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시위로 인해 혼란해진 시국을 수습하려는 일환으로 직선제를 포함해 발표했던 선언문)" 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대통령 후보자로써 선거유세를 다니는 등 (광주에서의 유세에서는 돌에 맞기도 함) 쉽지 않았던 상황들을 거치면서 1987년 12월 결국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별행사를 포함한 전두환 전대통령의 퇴임일이었던 1988년 2월 24일을 기준으로 다음날 25일에 노태우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섯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참고로 취임사는 (..앞부분 생략.. "국민들께서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셨을때" ..이하 생략.. "합의했던 민주주의라는 지도이며, 국민 화합이라는 나침반입니다!" ..이하 생략..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과의 우대를 한층 더 강화하는 한편 제 3세계와의 우의를 더욱 굳히겠습니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동아시아에 안정과 평화, 그리고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함께가는 민주주의의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이 자리의 주인으로써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가지고 씩씩하게, 그리고 단란하게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 딛읍시다!" ..이하 생략..) 이며 덧붙여 전두환 전대통령이 백담사에서 칩거중이었을 당시 그를 구속해야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자료도 있었습니다.

 

대통령 노태우.

취임 후 여러 업적들이 있지만 그 중 몇가지만 살펴보자면 공산 국가들과의 수교, 외교에 있어 (정책 등) 비약한 발전, 한반도 비핵화 선언, 88 서울올림픽 개최, 일본과의 관계완화, 이산가족 상봉 및 남북 자유방문, 유엔회원국 남북 동시가입, 자유 및 개방으로 인한 경제의 지속성장, 무역수지 흑자, 채무국가에서 채권국가로 전환, 언론에 대한 자유화, 부동산 시장의 장기적인 안정, 대기업의 신입사원에 있어서 명문대가 아닌 지방대 위주의 채용 의무화, 일명 "청명 계획 (1989년 3월에 반정부 인사에 대한 예비검속, 해당 목록의 A급에 분류됐던 인물로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 현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 당대표, 현 임종석 이사장 등이 포함) 이라고 하는 작전명에 민간인 사찰을 실시, "전교조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에 대한 불법화 정책, "10.13 선언 (일명 범죄와의 전쟁, 해당 선언 후 몇년동안 범죄율에 대한 퍼센티지가 소폭 감소)", 등이 있습니다.

 

퇴임.

집권 후반에는 김영삼 전대통령과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대통령 자리를 김영삼에게 물려주고 노태우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김영삼 전대통령에 의해 "금융 실명제 (금융 거래시 거래하고자 하는 당사자의 실명이 확인이 되어야 이뤄지는 제도)" 가 실시되면서 동시에 노태우가 비자금 관련의혹을 받게되자 부인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사실로 밝혀져 인정하게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인해 15년 이상의 징역 및 2600억원 이상에 달하는 추징금을 선고받습니다)

또한 "5.18 광주사태" 에 대한 발언 (혹은 망언) 으로 많은 사람들의 뭇매를 맞자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하고, 건강이 나빠져 휠체어를 타는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2011년 즈음에는 노태우의 폐 안에서 침술용 바늘조각이 발견되는 기현상이 세간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어찌보면 전두환 전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노태우 전대통령의 퇴임후에 삶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던것 같습니다.

 

의외로 이번 주제인 "노태우 전대통령" 의 인물에 관한 내용들이 정리가 빨리 되면서 글을 써내려가는데 있어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군요. 아무튼 정리하면서 재미있었던점은 1987년에 있었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풍자의 소재" 로 써도 된다고 허용하여 이때부터 대통령과 정치인에 대한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했다는 것인데, 필자는 따로 해당 작품들을 찾아보지 않아서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는 추후에 알아보고 난 후 수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부분은 1991년에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 참가했던 대학생 (강경대) 이 경찰의 폭력행사로 인해 숨지자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단체로 분신하면서 이른바 "분신정국" 사태가 일어나 해당 분신자살을 비판한 사람이 (김지하, 시인) 대학생들이 던지는 계란등에 맞아 당시 노태우 전대통령은 개탄과 함께 패륜이라고 질타한 사건이었고, 조금 놀라웠던것은 1997년 12월에 퇴임 후 징역형을 선고받은 노태우를 김대중 전대통령이 동서화합을 명분으로 그를 복권시킨 정보도 나와있었습니다.

또한 2003년 2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여 전두환 전대통령과 노태우 전대통령이 같이 앉아서 행사를 참관했다는것 정도겠네요. 그리고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노태우의 장남인 "노재헌 (현 동아시아 문화센터 원장)" 이라는 사람이 "5.18 광주사건" 에 대해서 "천번이라도 사과할 용의가 있고, 아버지인 노태우도 마음 아파했다" 라고 말한 기사가 나와있었습니다. 덧붙여  "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신지 10년이 넘었다. 말씀과 거동을 전혀 못하신지도 꽤 오래됐다. 아무것도 못하고있는 상황" 이라고 노태우 전대통령의 현재상태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습니다.

 

어쨌든 한나라의 수장이었던 사람으로써 장점은 장점대로, 단점은 단점대로 해당 인물에 대해서 각자 판단하는것이 틀리겠지만 요는 전두환 중심의 군부정권과 학생운동권 사이에서 유혈투쟁이 이어졌을 당시 그는 "6.29 선언" 으로 인해  "시국 수습" 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혼란한 정국을 화합국면으로 전환시켰다는 사안은 즉, 대통령으로써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므로 해당 인물에 대한 장점으로 필자는 인식이 되더군요. 하지만 비자금 등 단점 또한 빠질수없지만 열거하다보면 글이 길어질것같아 이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주의 마지막 금요일인 오늘도 활기차게 시작하시길 바라겠고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