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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윤보선 편)

윤보선.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두번째로 대통령직에 역임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에서 그의 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의 맏아들로 1897년 8월 26일 태어난 그는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졸업 후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정치계에 입문하여 (1945년) 약 6개월 정도 국회의원 및 서울시장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으며, 공식적인 대통령으로써의 재임 기간은 1960년 8월~1962년 3월 (약 1년 7개월) 입니다. 한국에서 및 한국인 최초로 미국대학을 졸업, 박사학위까지 받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윤보선의 멘토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이승만의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정책에 있어서는 반대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취임전에는 "제 1공화국 (헌법에 의한 이승만 정부의 시작 및 '4.19 혁명' 으로 제 2공화국이 생기기 전까지 유지되던 체제 및 시절)" 의 야당이었고 전임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비서, 장관, 총장 등을 지내면서 제 2공화국 시절에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게되지만 "5.16 군사정변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군인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사건을 통칭)" 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취임 전인 1955년 즈음에는 민주당을 창립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4년 뒤인 1959년 즈음에는 민주당내 최고위원회의 대표가 되기도 합니다.

참고로 연계되는 인물로는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 후 첫번째 장관으로 본인이 임명하게 되는 '장면' 이라는 사람이 있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이듬해인 1963년과 1967년에는 윤보선이 두번에 걸쳐 대통령 재선거를 치루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두번 다 패한 이력이 존재하게 되며, 1980년대 즈음부터는 규탄집회를 열기도 하고, 위장 결혼식에 연루되어 재판장에 서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병이던 당뇨 및 고혈압 등을 앓으며 1990년 7월 18일,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구명운동 및 문화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는 내용의 자료도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비교적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알려져있는 윤보선은 그의 조상들도 벼슬을 지낸 비교적 지위가 높은 가문의 출신이라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아버지인 '윤치오' 라는 사람은 지인의 보증을 서는 바람에 빚을 지는일도 있었지만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의 재력으로 집이 무너지는것을 막았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유년시절의 삼국지 이야기는 후에 윤보선에게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충성심등에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고, 또한 충성심 및 효도에 대한 가르침과 특히 윤보선의 할아버지는 술에 관해서 그의 선조조차 술로인해 패가망신한 일례를 들어가며 수 차례 윤보선에게 설명을 했다고 하니 할아버지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후에 성인이 되는 윤보선이 정치에 입문해서도 술은 거리를 두었다는 말도있으며, 기억력이 우수하고 다소 고집도 세다는 경향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7년 즈음에 대구에서 일어난 일명 "국채보상운동 (대한제국당시 채무된 빚을 상환하기 위한 국민들의 애국운동)" 당시의 어렸었던 윤보선은 점심을 절식하면서까지 용돈을 소량씩 모아 스스로 보내기도 했다는 내용의 자료도 있었고, 이후에 그의멘토가 되는 이승만을 만나기도 하는 등, 본래부터 윤보선 집안은 풍족하여 그가 학교를 졸업 후 금전적으로나 기타 이유등으로 에러사항없이 수월하게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영어를 배우기도 하지만, 당시의 윤보선은 일본에 있으면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히 높았기에 학업을 이어가는것은 사실상 무리여서 정상적으로 학업을 마치지는 못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 후 '여운형' 이라는 독립운동가를 만나 중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위한 돈을 한국에서 모으고, 여운형과 같이 1917년 즈음 중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사진출처: 뉴욕한국문화원 (해당 주제인물과 관련은 없습니다)

독립운동.

중국에 도착한 뒤 윤보선은 몇몇의 독립운동가들을 여운형을 통해 소개받기도 하고, 태어난 후 지금까지 풍족했던 집안에서 호화롭게 생활하던 윤보선의 이제까지 환경과는달리 쪽방 비슷한 곳에서 지내게 되면서, 1919년 3월 1일 일명 '3.1 운동' 후에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기도 하고, 자금조달 및 언론사 보조를 병행하며 중국에서 생활한지 3년정도 지난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에든버러에서 학업중에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윤보선은 병상에 눕게되고, 휴학을 하게되어 본래 기간보다 더 늦게 졸업을 하게 됩니다. (주목할 점은 해당 대학교의 재학시절 당시 한국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만큼 한국인으로써 일본인을 반대하는 마음으로 인해 윤보선은 유학생들중 일본출신의 유학생들과는 한마디의 말도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던 윤보선은 이어 유럽여행을 결심하게 되고 그렇게 여행하던 중, 생활비가 고갈되는 시점에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후에 윤보선은 일본제국의 감시하에 집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인사하러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외엔 일체 집밖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다만 몇몇의 신뢰가 가능했던 지인들을 통하여 이승만과는 이따금씩 만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15년 결혼한 아내와 사별하기도 했고, 폐렴을 앓기도 하는 등 그렇게 1945년에 해방이 되자 윤보선은 정계에 입문하게 되면서 창당참여 및 다양한 활동들을 거치게 되고, 이후 1948년부터 서울시장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당시 서울은 쓰레기들로인해 거리가 몸살을 앓고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저질러놓은 배설물의 불결함, 냄새등은 이로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하니 윤보선 서울시장의 가장 큰 숙제는 '거리를 청소하는 것' 이였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고 하고, 또한 거리의 쓰레기들로 인해 윤보선은 서울시 거리 곳곳에 쓰레기통을 배치하게 되는데 현재 (2020년) 도 전국에 배치 (설치) 되어있는 거리 곳곳에 쓰레기통들이 어떻게 보면 윤보선 서울시장에 의해 계승 (?)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아무튼 이로인해 서울거리는 깨끗해졌고 서울시장이 아닌 '청소 시장'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의류보급 및 변기보급 등의 업적이 있고 시장기간 동안에 재혼도 하게 됩니다.

 

대통령 취임 전, 후 윤보선.

장관시절의 윤보선은 전임 장관의 뇌물혐의 등으로 인해 지인들의 식사대접 거부는 물론, 먹을 식량을 도시락의 형태로 싸서 다니고 공적인것 외에 사소한것 조차도 사적으로는 쓰는일이 없었으며 선물등도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덧붙여 장관 재직시절에는 이승만과의 본격적인 갈등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승만의 부당 인사요구를 윤보선이  거절, 이승만 주위에 간신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을 정리하는것이 좋겠다는 윤보선의 제안에 대한 이승만의 무시, 등을 이유로 윤보선은 이승만을 손절하게 되고 장관직에서도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에 윤보선은 3대, 4대, 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고 민주당 내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후에 대한민국의 2번째 대통령 (4대) 으로써 1960년 8월 12일 취임을 하게되고, 당시 헌법은 대통령이 당에대한 소속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윤보선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8월 13일 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기도 했으며, 당시 '경무대' 라는 대통령 관저를 "청와대 (현재까지 쓰이고있는)" 라는 이름으로 바꾼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후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 '5.16 군사정변' 당시 사실상 국정에 관한 통수권을 가지고 있던, 즉 윤보선이 대통령 취임 후 임명했던 '장면' 국무총리는 해당사건이 발생하자 수도원으로 숨어버렸고 윤보선은 쿠데타를 저지하는것과 쿠데타를 받아들이는것 두가지 선택지에서 본인의 가족들을 먼저 도망가게하고 본인은 청와대에 남는 결정을 하게됩니다. 당시 주한미군 관계자들은 쿠데타 저지를 목적으로 숨어버린 '장면' 을 찾을길이 없어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군 병력동원 허가를 요청했지만 윤보선은 끝내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당시 쿠데타의 박정희 및 군인들이 나타나자 윤보선은 별다른 저항이 없었고 체념한 상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통령 사퇴.

1961년 5월 19일 윤보선은 대통령직 사퇴에 관한 발표를 했습니다. 당시 발표 내용은 '군사혁명의 발생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소중한 인명피해가 없길 바랬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은 우리를 도와 무사히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 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했고, 국민 여러분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걸 알게 된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다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민들을 하루빨리 어려움속에서 구해주기를 바라면서 내 친애하는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줄것을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였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인 20일, 발표했던 사퇴성명을 번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용인 즉슨 '사퇴의 뜻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마음이 약해서도 아니고 군인, 김차관의 청이 절실해서도 아니며, 추가로 군정이나 개인을 위함은 아니었다. 국가의 한 원수로 혁명정부가 들어선것에 대해 책임을 피할길이 없는데 정부가 국가에 대해 또 다른 문제가 발생된다면 더 큰 책임을 피할길이 없어지는것이 아닌가?' 입니다.

쿠데타 사건 이후에도 윤보선의 대통령 직위는 유지되었으나, 5.16 군부와의 잦은 마찰로 인하여 1962년 3월에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됩니다. 하야 후 윤보선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지인들과 데모를 나가기도 하고, 두 차례에 걸친 대통령 선거에 재도전했지만 전부 떨어지고 맙니다. 계속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념대결, 사상논쟁 등 서슴없이 펼치기도 했고 대선 기간중에는 윤보선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두번째로 역임한 윤보선 대통령에 대해 정리해 봤습니다. 정리하다보니 다른건 둘째치고 "청소 시장" 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부분에서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업적도 업적이지만 당시 서울거리가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소위 사람의 "인분" 까지 길가에 나돌았을까 라는 생각이 지금도 머리에서 떠나질않고 있습니다. 후대로써 현재를 살고있지만 당시에는 태어나지 않았던 서울의 그 거리가 정말 궁금해지네요.

다른 부분은 먼저결혼했던 아내와 안타깝게 사별한 이후 10년이상 재혼하지않고 독신으로 생활했다는 자료도 나와있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 창시개명을 거부하고 신사참배령에 불응하는 등의 행동도 있었다고 합니다. 재임기간은 짧았지만 덕분에 몰랐던 부분까지 알게되어 정리하는내내 필자한테 있어서도 유용한 시간이었습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건강관리에 유의하시고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