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대한민국에서 일곱번째로 대통령을 역임한 김영삼 전대통령은 취임전에는 정치인이자 민주주의 운동가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박정희 전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의 권위주의적인 군부체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맞섰던 (반대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생애.
한국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써 지배를 받던시절인 1927년, 한반도의 남동쪽 끝에있는 지금의 경남 거제 (통영시) 에서 12월 20일에 당시 풍족하게 어업을 이끌어나가던 아버지 (김홍조) 와 어머니 (박부련) 사이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삼의 위로 두명의 형도 있었는데 둘 다 이른나이에 요절했다고도 알려져있지만 정확하지가 않아 혹, 추후에 추가적으로 확인이 되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영삼은 이후 여덟살이되던 즈음에 거제시 장목면에있는 한 소학교 (현 장목초등학교) 에 입학하게 됩니다.
(참고로 지도상으로 봤을 때 김영삼 전대통령이 태어난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와 현재의 장목초등학교 사이의 거리가 자전거를 타더라도 약 8.5km 가 족히넘는 굉장히 먼 거리라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걱정으로인해 그의 부모님은 일정한 방세와 식비를 부담하며 소학교 재학동안에는 김영삼을 학교근처에 있는 집에서 숙식을 하게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또한 일제통치기간의 일본인들을 굉장히 못마땅해했으며, 중학교 (현 통영중학교) 재학시절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인들과 대치되는 등 마찰 및 싸움등이 일어나기도 했고, 이로인해 해당 중학교의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기약없이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되는 벌을 받기도 합니다.
이후 서울에 위치해있는 대학교 (현 서울대학교) 에 입학하게되고, 대학생으로써 학업을 이어가던 중, 한 행정기관에 당시 장관이었던 "장택상" 이라는 사람과 인연이되어 그의 선거당선을 돕기도하고 나아가 1950년에 일어난 "6.25 한국전쟁" 으로인해 학도병 (전쟁 등 발발시 학생신분으로 적군과 싸워야하는 학도의용군) 으로써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 전장에 나가지는 않고 군사선전 및 보도 등을 방송으로 알리는 자리에 위치되어 전쟁중의 임무를 이어가던 중 서울대학교에 교수님의 추천으로 그의 (장택상) 비서관이 되기도 하는 등 김영삼과 장택상의 사이가 각별해지게 됩니다.
정치.
전쟁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당시 자유당 소속이었던 "이기붕 (장관 및 국회의원, 대통령 (이승만) 비서 등을 거치면서 동시에 부정선거를 통해 잠시나마 부통령 (현 국무총리) 에 당선되는 인물)" 이라는 사람을 만나게되는데, 자유당에 들어오라는 이기붕 및 당 내의 사람들로부터 요청을 받아 김영삼은 자유당 (여당) 소속이 되지만 "헌법 개정" 과 관련하여 이승만 전대통령 및 이기붕과의 적지않은 마찰을 빚으면서 일명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이 대통령이던 제 1공화국 시절, 1954년 5월 20일에 열렸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이자 대다수의 의석수를 가졌던 자유당이 "초대 대통령" 에 한해 연임제 폐지 (즉, 이승만을 평생동안 대통령직에 유지시키기 위함) 를 포함한 개헌안을 발의하게 되지만, 3/2 (136명 통과기준) 의 정족수 (찬성자) 중 "단 한명" 의 반대표로 인해 135명으로 해당 개헌안이 부결되게 되자, 이에 자유당은 찬성자를 반올림을 하여 일방적으로 해당 의안을 다시금 합당하다 결정하여 통과시킨 사건)" 이 통과가 되게되고, 이러한 불의에 고개를 저으며 김영삼은 결국 자유당을 탈당하게 됩니다.
이후부터 1955년 즈음 민주당에 들어가 야당의 의원으로써 정치활동을 이어가며 독립운동가들 및 "장면" 등을 만나기도 하고, 1958년 즈음에는 민의원 선거에도 출마를 하지만 떨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1960년 즈음에는 김영삼의 외포리에 위치한 고향집에서 북한 간첩이 침입하여 그의 모친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참고로 사건당시 김영삼의 모친이 "아는 사람이 이럴수가 있느냐?" 라고 말한소리를 들었다는 이웃사람들이 있어, 시해한 일당들이 간첩이 아닌, 김영삼의 부친 (김홍조) 이 소유하던 멸치어장에서 근무했던 "노동자" 라는 정보도 나와있으나 확실하지가 않아 혹, 추후에 추가적으로 확인이 되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찌됐든 같은 해 4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저지른것이 탄로나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되고, 이후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면서 동시에 김영삼이 몸담고있던 민주당 또한 자연스럽게 야당에서 여당이 되어 다시금 여당의 의원으로써 정치활동을 이어가게 되지만 당시 대통령이던 윤보선의 실권을 가지고있던, 사실상의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장면" 국무총리의 기대에 미치지못하는 (무능했던) 정치 등으로 인하여 김영삼은 장면을 강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윤보선 대통령과도 거리를 두면서 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1961년에 일어난 일명 "5.16 군사정변 (당시 군인이었던 박정희 전대통령을 필두로 다수의 군인들과 함께 "군정수립" 을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 사건)" 에 대한 정보를 김영삼이 알게되었고 해당 사건이 일어나자 서울에있던 정치인들이 국회가 해산될 정도로 너도나도 각자 모습들을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김영삼은 피하지 않고 서울에 도착하게 되고, 쿠데타로 인해 혼란해진 와중에 "민정당" 이라는 정당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 및 데모에 윤보선 전대통령 등과 같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데모를 했다는 이유로인해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박정희 전대통령의 장기적인 군사집권에 대해 김영삼 역시 이에 반대하면서 계속해서 투쟁 등을 이어가게 되지만 1969년 6월 20일날, 일명 "질산 테러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요약하자면 성인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사내들이 당시 집으로 향하던 김영삼의 차량에 해당 질산이 들어있는 병을 투척)" 사건이 김영삼에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한 1973년 즈음에는 김영삼의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김영삼은 곧장 정부에 항의하기도 하고, "유신 체제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 전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헌법적 비상조치)" 에 대해서도 역시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면서 후에 1979년 8월 즈음부터는 "YH 무역 (가발 수출업체)" 회사의 약 200명에 달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당시의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를 메인으로 시위를 벌이는 일명 "YH 사건" 에도 함께하게 됩니다.
경찰들과 김영삼의 몸싸움, 마찰 등이 이어지던 와중에 노동자 한명이 추락사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박정희 전대통령은 해당 사건을 계기로 김영삼을 신민당내의 총재직에서 제명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가택 연금 (본인의 집 안에 갇히게 되는 벌)" 을 명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영삼을 제명한 댓가 (?) 로 박정희 전대통령은 일명 "부마 민주항쟁 (1979년 10월 16일에 대학생들이 유신정권 및 정치탄압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 이 일어나게 되는, 예상치못한 '기폭제' 역할을 하게되면서 이로인해 열흘뒤인 "10.26 사태 (1979년 10월 26일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김재규라는 대통령 최측근의 인물이 총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을 시해)" 로 인해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합니다.
유신체제의 붕괴.
1980년 5월 즈음의 김영삼은 전두환을 필두로 결성되어 일으킨 신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또다시 "가택 구금" 을 당하기도 하면서 "5.17 비상계엄 (시국수습을 이유로 확대되었던 신군부의 정치적 탄압)" 과 관련하여 신군부를 비판하기도 하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군사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김영삼은 단식투쟁을 단행함으로써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합니다.
1983년 즈음에는 라이벌인 김대중과 같이 "민주화 의회" 를 만들기도 했고, 이후에도 단식투쟁은 계속되면서 병원에 입원하는 등 철야농성에도 동참하게 되면서 계속적인 정치행보들을 이어가는데 1897년 즈음부터는 김대중과 함께 또다시 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창설 후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유세를 다니기도 하고, 군사정권의 몰락 및 문민정부를 굳건히 세우겠다는 선거공약도 내세우지만 이 시기에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의 단일화 (선거에서 각각의 정당에서 다수의 후보들이 대선에 승리하기 위하여 출마하게 되는데 어느한쪽의 인기가 너무 높을 (ex: 홍길동) 경우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ex: 장길산, 임꺽정) 나머지 후보들 중 한명 (장길산) 만이 출마하여 (임꺽정은 물러나 주고) 인기가 높은 후보와 엇비슷하게 대선을 치르는걸 말함) 의 문제해결을 위해 한곳에 마주하게 되는데 서로간에 의견이 상반되는 결과가 나타나 결렬하게 되고, 선거가 임박해 있던때에 김대중은 몸담고있던 민주당을 돌연 탈당하여 새로운 "평화 민주당" 이라는 정당을 창설하게 되지만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패배를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국회의원 선거 시기중에 김영삼은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과 인연이 되어 이후부터 노무현 전대통령을 정계에 입문시키기도 하는 등, 김영삼은 노무현에 대한 지원 및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는 정보도 나와있지만 얼마 가지않아 둘 사이도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199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하나의 여당과 두개의 야당에 대한 3당의 합당 관련) 멀어지게 됩니다.
김영삼 대통령.
1992년 3월 즈음에 열린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은 당시 "민주자유당 (또는 신한국당, 지금의 미래통합당의 전신인 우파정당)" 소속의 일원으로 대통령 후보로써 대선에 출마하게 되고 라이벌인 김대중 역시 마찬가지로 출마하게 되면서 동시에 김영삼은 국회의원직도 내려놓게되는 시기입니다.
선거 후보로 나란히 등장한 YS 와 DJ 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집단의 방해공작 및 도청사건 (일명 "초원복국 사건", 요약하자면 부산에 위치한 복어요리 음식점에서 당시 정부의 관계자들이 모여 민자당 후보의 김영삼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모의하던 도중 해당 관계자들의 대화가 도청되는 등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게 된 사건) 등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우리가 남이가!" 라는 슬로건과 함께 김대중을 누르고 대한민국에서 일곱번째 대통령에 공식적으로 당선되게 됩니다.
대통령 취임 후 업적들이 많은데 몇가지 짚어보면 우선 군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 (이후에 대한민국에서 언제라도 군부 쿠데타가 실현될 일말의 여지도 사라지게 함), 비리와 관련하여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에 의한 금융실명제 (금융기관과의 거래시 본인 명의가 아니면 거래가 불가능한 제도), 공무원들의 재산공개 및 등록 (이로인해 공직사회가 투명해짐), 비자금 등의 국고환수, 지방자치제도의 확대 도입, 선진국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OECD 에 가입, 쓰레기 종량제실시 등이 있지만 집권 후반에 일명 "IMF 경제위기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한 대한민국의 경제에 있어 많은 외국자본을 빌려쓰게 되는데, 과정 중 정부의 외환관리 부실 (어음을 발행한 기업들의 부도) 등으로 인한 외환위기)" 가 터져버리는 일이 발생하면서 국제 금융기관으로 부터 외화를 지원 (590 억 달러, 즉 한화로 약 70조에 달하는 규모) 받아 위기가 일단락이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측근들과의 갈등 및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에 관한 뇌물 및 권력남용 혐의, "한총련 (1996년에 연세대학교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폭력사태)" 사건, 3당 합당, 정치자금의 가능성에 대한 의혹, 지역감정 조장 등, 김영삼 대통령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 및 부정적인 평가로 나뉘고 있습니다.
퇴임 후.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비리 및 뇌물등의 의혹으로 인해 김영삼 전대통령의 퇴임후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던것 같습니다. 퇴임한 후에도 여, 야 정당의 지도자로써 정치활동은 계속하게 되는데 도중에 한 노인으로부터 페인트가 들어있는 달걀을 얼굴에 맞아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나아가 노무현 전대통령과 17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이회창 전국회의원 및 군부정권 시절에 대통령직을 역임하였던 박정희 전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을 정치와 연관지어서 맹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한 김대중 전대통령을 찾아가 병문안을 했던 사례도 있지만 2015년 11월 즈음에는 김영삼 본인의 몸도 병으로 인해 서울대학교 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겨지게되고 병마와의 사투중 같은해 11월 22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김영삼 전대통령은 병원에서 서거하게 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을 정리하면서 느낀점은 우선 1961년 박정희 전대통령의 "5·16 군사정변" 이후 야당의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이 반(反) 군부 투쟁에 나섰다는 점인데, 먼저 군정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가택연금에 처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박정희 전대통령의 "3선 개헌" 을 비판하던 와중 집 근처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 를 당할뻔했다는 부분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의 납치사건처럼 직접적인 지시가 청와대에서 내렸는지는 불확실) 그야말로 김영삼은 항거하려고 "목숨" 까지 내걸었다는 내용이 필자로 하여금 "군부 정권" 에 대해서는 정말 누구보다도 치를떨었던 사람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했고, 실제 2009년에 있었던 인터뷰때는 "김대중과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못을박은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전대통령과의 관계도 역시나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것이, 퇴임후에도 김영삼은 계속해서 전두환을 비난했고, 이명박 전대통령이 주최한 "전직 대통령 초청" 때도 "전두환이를 왜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술을찾던 전두환에게 "넌 청와대에 술 먹으러 왔냐?" 라고 대놓고 말하자 전두환은 곧장 집으로 가버린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2015년 11월, 김영삼 전대통령의 조문당시 화해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전두환 전대통령은 끝끝내 답을 안했다라는 일화가 필자로 하여금 불같은 성격끼리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었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게되는 부분이었습니다만, 이와는 또 반대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시해당한 후, 청와대에 설치된 빈소를 찾아 김영삼 전대통령이 직접 조문했다는 내용도 나와있더군요.
모 목사분께서 "죽었다고 용서하면 안됩니다" 라고 말하자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라고 해당 목사를 타일렀다 하니, 실로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도 생각이 들었습니다. 덧붙여 가발회사인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을 당시, 김영삼이 직접 신민당 당사를 에워싸고 까칠하게 굴던 경찰간부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는 부분이 불의에 있어서의 전투력이 전두환 전대통령의 불도저같은 성격과 겹쳐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집권당시 "조선 총독부" 의 철거에 대해서는 많은 설왕설래가 현재까지도 오고가더군요. 하여 따로 업적부분에 내용을 정리하지는 않았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 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긴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보를 찾는데 있어 도움되셨길 바라면서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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