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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김대중 편)

김대중.

정치인이자 후에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역임하게되는 그는 2000년 "노벨 평화상 (매년 10월, 노벨 위원회에서 각국의 전문가 천여명에게 서한을 보내 후보자 추천을 받아 선별작업을 거쳐 수상자를 발표)" 수상자 였으며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북한 및 일본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도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때때로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의 흑인 대통령, 인종차별에 맞섰으며 김대중 전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 로 불리기도 했고, 또한 "야당" 의 후보자로써 1997년 12월 실시되었던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최초로 승리하면서 길었던 50여년의 보수적인 통치를 종식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생애.

한국이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하에있을 시절이었던 1924년 1월 6일에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부유하지 못했던 가정환경에서도 공부하는것을 좋아해 성적이 높았고, 한문을 배우면서 동시에 이른나이부터 신문을 (특히 정치와 관련된) 자주 정독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여덟살이 되던즈음 (1933년) 신안 하의면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학업을 이어갔으며 열두살이 되던 (1937년) 해에는 목포에 위치해있는 한 소학교 (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 로 전학을 가게되고, 당시의 일본인 동급생들에 의해 소외되기도 하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고 이로인해 상장까지 받습니다.

이어서 목포에 위치해있는 중,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계속해서 학업을 이어가게 되는데 동급생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통솔력이 뛰어난 덕분에 연달아서 반장을 도맡기도 하고, "임종기 (국회의원)" 라는 사람 (동창) 을 이때 만나서 서로의 사이가 돈독해지기도 합니다. 특히 청소년기의 김대중은 그의 어렸을적 자주 정독했었던 신문탓인지, 웅변 및 역사과목에 지대한 재능을 보였다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능들이 오히려 민감했던 청소년 시기에 "반일사상 (일본을 반대하는 사고 및 사상)" 이 생겨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므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우수했던 성적이 떨어지게 되면서 김대중은 결국 대학에 가는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기의 김대중은 "도요타 다이쥬 (豊田大中)" 라는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했으며, 훗날 대통령이 된 후에도 해당 창씨개명한 일본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했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

1944년이 되던 해 김대중은 재학중이던 학교 (현 목상고등학교) 를 졸업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일명 "태평양 전쟁 (1941~1945)" 이 막바지에 이르러 전쟁상황이 크게 악화되고, 병력부족이 심각해지자 당시의 일본제국이 조선에 징병제를 시행하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김대중은 졸업과 동시에 일본제국의 강제징집을 피해서 목포의 한 일본 계열의 해운회사에 근무하게되고 이듬해인 1945년에 조선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조선독립동맹 (또는 조선신민당, 김두봉 이라는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등을 필두로 1946년에 결성한 정당)" 이라는 당에 들어가 당원으로써 활동을 하게됩니다.

이후 "조선건국 준비위원회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만들어진 단체)" 와 관련된 벽보를 동생이었던 "김대의" 와 붙이던 중, 맥아더 장군이 발표한 포고령에 위배되는 행위로 체포되기도 하고, "차용애" 라는 김대중의 첫번째 부인과 이때만나 결혼도 하게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 해운회사에서 근무했던 경력으로인해 선박회사를 차리고 해운업을 이어가게 되는데 (해당 해운업으로 인해 당시의 김대중은 많은돈을 벌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좌파계열의 연합단체 소속이었던 사람에게 자금전달과 관련하여 경찰에 체포되는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1950년에 북한의 남침에 의해 일어난 6.25 전쟁기간 중에는 당시 서울이 북괴 공산당에 점령이되면서 한 청년단체의 소속을 이유로 김대중은 북한 인민군들에게 체포가 되기도 합니다.

처형 직전까지 가게되지만 맥아더 장군의 일명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의 지휘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 전쟁의 전세를 바꾸게된 군사작전)" 으로 인해서 기적적으로 화를 면하게되지만 구금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감옥에서의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하고, 또한 목포에서 군대에 입대하여 북한의 공산당을 토벌하는데 일조를 했다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후에 전쟁이 끝나고 1954년이 되던즈음의 김대중은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지만 떨어지게 되고, 이시기에는 선박회사를 처분하여 웅변학원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정계진출을 위해 여러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게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정치.

정치행보를 이어가면서 많은 정치인들과도 자연스럽게 알게되는것을 계기로 "민주당 (1955년에 일어난 사사오입으로 인해 보수 및 탈당파, 흥사단등의 반 이승만 세력이 모여 창당한 정당)" 이라는 정당에 들어가게 되고, "장면" 과도 인연이 되면서 이후 1958년에 있었던 제 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써 김대중은 출마하게 되지만 또다시 참패의 맛을 보게되고, 덮친격으로 첫번째 부인이었던 차용애가 사망하는 등 다소 탈 많은 1950년대의 후반을 보내게 됩니다. 1960년대 부터는 당내에서 부위원장 및 기획위원, 대변인 등의 직책을 맡게되고, 같은해 3월 15일에 일어났던 부정선거에 대항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제 5대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로 또다시 출마하지만 다시금 떨어지게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서 민의원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루지만 "5.16 군사 쿠데타" 로 인해 당선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의원활동은 하지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이희호" 라는 김대중의 두번째 부인과 이때만나 재혼을 하기도 하면서 1963년에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또다시 출마를 하게 된 결과,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비로소 당선되게 됩니다. 당선 이후 김대중은 재선 국회의원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되는데 어렸을적 웅변에 대해 탁월한 소질을 보였던지라 국회에서의 본회의 연설에서 그가했던 장시간에 이어진 발언으로 "기네스 증서" 를 받습니다.

이어 "신민당" 이라는 정당에 참여하기도 하고, 6대에 이어 7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당선되면서 1970년이 되던해에는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자로써 대선에 출마하게 되어 이듬해부터 선거유세를 다니게되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에 의해 김대중은 선거에서 석패하고 맙니다. 선거 이후에 일련의 사건들이 김대중에게 일어나게 되는데 우선, 본인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지기도 했고, 덮친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나는 바람에 부상을 입기도 하면서 이를 이유로 당시의 김대중은 치료차 일본을 자주 왕래하게 되는데 도중에 발표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로 인해 김대중은 미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합니다.

망명중에도 일본 및 미국을 오가면서 유신체제에 대해 계속되는 김대중의 비난은 이어졌고, 1973년 8월즈음 일본에서 투숙 중 괴한들에 의해 납치된 후 몇일 뒤 김대중 본인의 자택에서 풀려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로인해 김대중은 가택구금과 동시에 어떠한 정치적인 활동도 하지못하는 제약을 받습니다.

 

사형선고 및 망명.

유신정권 시절인 1967년의 김대중은 일명 "3.1 민주구국선언 (윤보선, 김대중 등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긴급조치 해제, 석방, 언론 및 집회등의 자유, 대통령 직선제, 군사정권 퇴진 등의 내용을 발표한 선언)" 이라는 것을 낭독함으로써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고, 5년에 달하는 징역 및 자격정지를 선고받아 교도소에 갇히게 되어 죄수신분으로 감옥내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단식투쟁도 병행하게 됩니다.

이후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전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하게 되면서 김대중은 자유의 몸이 되지만 그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의 일명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김대중 및 민주운동가 20여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5.18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긴 사건)" 으로 인해 체포되어 자유의 몸에서 다시금 죄수의 신분이 됩니다.

그리고 재판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법정에서 했던 김대중의 최후진술이 국제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고 세계각국에 인권단체 등의 사형반대로 인해서 사형에서 감형으로, 마지막은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유받아 앓고있던 지병의 치료 및, 어떠한 정치적인 활동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작성하여 제출함으로써 김대중은 미국으로 출국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1980년 5월경 김대중을 체포한 당시의 전두환 정권이 사건발생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81년 1월 23일에 대법원에서 김대중에 사형을 확정, 1982년 3월 2일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 된 뒤 12월 23일, 약 2년 7개월의 옥고끝에 형 집행정지로 미국으로 강제 망명. 후에 2004년 재심에서 법원이 내란음모와 관련하여 무죄를 선고하면서 25년만에 해당사건은 종료)

현재 환율기준으로 약 구천만원에 해당하는 달러까지 받으면서 어떠한 정치적인 활동도 하지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김대중은 미국 보스턴에 도착하지만 얼마안가 미국내의 정치인들과 만나고 인터뷰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의 정권에 대해서 독재라는 등 한국정부에 굉장히 비판적인 서방신문 및 여러 의견을 작성하면서 미국내의 정치활동을 하게되자 당시의 전두환은 몹시 분노하여 김대중의 귀국을 하지못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지만 미국의 일명 "김대중의 무사귀국" 에 대한 보장 및 압력으로인해 2년뒤인 1985년에 김대중은 미국의 비호아래 한국으로 무사귀환을 하게되고 가택구금외에 어떠한 조치도 받지않게 됩니다.

이후 1987년 즈음에는 13대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통일민주당으로의 입당 및 김영삼과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한 문제를놓고 협의하기도 하지만 서로 상반된 주장으로 인해 갈라서게 되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함과 동시에 평화민주당을 창설하여 대통령 선거에 임하게되며 그 결과, 노태우와 김영삼에게 고배를 마시고 맙니다.

 

대통령 김대중.

선거에서 떨어진 뒤 김대중은 국회의원으로써 정치적인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가다가 1992년 즈음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지명되면서 또다시 대선에 출마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후반에 후계자와 관련해서 김영삼과 마찰이 일기도 했지만 결국 김영삼이 후계자로 지목이 되면서 14대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당시 대선 후보로 출마한 "정주영" 이라는 국회의원도 포함) 대결구도로 주목받게 됩니다. 하지만 도청사건 및 지역감정발언 등으로 인해 꽤나 시끌했던 대선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13대 대선때와 마찬가지로 14대 대선도 김영삼에 의해 대통령 당선이 이루어지지 않게되자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영국에서 (현 케임브리지 대학) 대학교의 클레어 홀에서 연구활동을 하기도 하는 등 국회의원이 아닌 평범한 시민으로써의 삶을 지내다가 주변인들의  계속되는 권유로 인해 은퇴했던 정계로 다시 복귀하게 되고, 1997년 즈음에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선출되게 됩니다.

이때의 대결구도는 김대중,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소속), 이인제 (당시 국민신당 소속) 의 삼파전으로 주목받았고, 이회창 후보의 초반 지지율이 높았지만 그의 아들에 대한 병역관련 의혹으로 인해 지지율은 다시금 하향세를 타면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던 김대중의 지지율은 오름세를 보였던 때이기도 했으나, 비자금과 관련하여 상대 진영의 신한국당에 의해 고발당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악재속에서 세명간의 공방전 또한 치열하게 거친결과, 이회창 후보를 약 1.5% 라는 굉장히 근소한 차이로 가까스로 제치고 대한민국의 여덟번째 대통령에 김대중은 공식적으로 당선되게 됩니다.

취임 후 업적들을 살펴보면 먼저 산마리노 (이탈리아 내에 위치한 나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및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에 위치해 있는 섬나라) 와의 수교, 특히 "동티모르 내전 (1976년 인도네시아로 합병된 이후부터 1999년 유엔의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인도네시아 정부가 독립운동을 벌이던 동티모르에 행한 유혈 탄압사태)" 에 "상록수 부대 (동티모르에 파견된 한국의 평화유지활동 부대)" 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동티모르를 도우며 문제해결에 앞장, 무역 흑자,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 후 가장 큰 과제였던 IMF 경제위기에 대한 극복, IT관련 기업육성,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등이 있습니다.

 

퇴임 후.

노무현을 후임으로 2003년 2월 24일,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를 끝내고 퇴임하게 되는데 이후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서 무죄를 받고, 해외순방 및 OECD, WHO 등에서 김대중 특유의 웅변스킬로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다수의 정치인들에 대한 의혹제기, 비판 등 정치적인 활동역시 이어가게 되지만 2009년 7월 즈음 폐렴으로인해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입원 중 이명박, 김영삼, 전두환, 박근혜 전대통령들이 문병을 가기도 했으며 이회창 총재, 현 민주당 정세균 국무총리 등도 병문안을 가서 해당 김대중의 병세를 위안하기도 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되어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오던 중 2009년 8월 18일 오후 13시 43분에 향년 86세의 나이로 김대중 전대통령은 병원에서 서거합니다.

 

마무리 하며.

정리하면서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 느낀점은 우선 납치, 살해 위협, 연금, 구속과 투옥 등으로 인해 고난의 삶을 살았다는 부분입니다. 한마디로 한국 현대사의 암울했던 시간을 고스란히 경험하며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30여년에 가까운 어려운 시기를 겪어냈다는 점에서는 대단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다만 좀 의아했던 점은 1967년 즈음 박정희 전대통령이 6대 대통령 선거당시 공약으로 내세운 "경부 고속도로" 의 건설에 대해서 지역편중론, 부유층을 위한 호화시설, 농지 훼손, 표심을 위한정책 등을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선거가 끝나자 이에 그치지 않고 김대중과 김영삼은 나란히 건설현장에 드러누워 결사반대를 외치며 방해를 했다고 하고, 악착같이 공사를 막은결과로 인해 기존의 도로건설 비용에서 추가적으로 더 큰 비용이 들었다는 사안은 좀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물론 당시의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언론 및 학계에서도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대해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해당 고속도로로 인해서 2020년인 현재도 경제효과의 이점을 보고있다고 생각하는 필자인지라.. 물론 완공이 되기까지의 과정중에 사망자가 다수였다는 점은 굉장히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포항제철 건립때도 "우리나라는 농업국" 이라는 이유를 들어 격하게 반대를 했다는 점은 "개인적" 으로는 아쉬웠던 사안이었습니다. (저마다의 의견이 틀린지라 "개인적" 인 생각이라고 언급을 하겠습니다)

 

참고로 업적부분에 포함하기가 애매한 사항들이 있어서 포함하지 않은 몇가지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1998년 11월 한일간의 "어업협정 체결" 인데, 해당 체결로 인해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내세움과 관련하여 헌재에서 재판까지 간 사례가 있어서 업적에 포함해놓지 않았고, 대북의 화해 및 협력을 목적으로 펼쳤던 "햇볕정책" 에 관해서 현재도 많은 사람들의 설왕설래가 오고가는것 같아 이 역시 업적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1999년과 2002년에 일어났던 "연평해전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의 기습공격 및 NLL 침범으로 발생한 대한민국과 북한간의 해전)" 에 대해서인데, 아이러니 하게도 평화를 목적으로 펼쳤던 "햇볕정책" 이 시행되고있을 당시에 무려 두번이나 일어났던 북한의 "무력 도발" 이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2002년에 일어났던 두번째 연평해전때 김대중 전대통령의 대응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있어 이 역시 업적에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현재도 많은 말들이 오가고있는 인권위원회 및 여성가족부의 설립, 측근 비리와 최규선 게이트등 이외에도 많았지만.. 아무튼 서거했을 당시 각국의 많은 정계대표들이 애도를 했을정도면 "외국사람들의 시각" 에 한해서 김대중 전대통령이 "존경 및 선망의 대상, 또는 대단히 평화적인 사람" 이라고 생각했을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또한 "노벨 평화상" 까지 수상했으니 한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물론 김대중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없이 좋은사람으로 기억됐을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습니다. 글이 많이 길어졌네요, 전국적으로 소나기가 내리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안전 및 빗길운전에 특히 유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활기찬 하루 되시길 바라겠고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