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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노무현 편)

노무현.

"인권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이자 대통령이었던 그는 한국정치에 있어서 지역주의를 극복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진보적인 성향이 짙은 인터넷 세대의 젊은이들 및 특히 이른바 "386 세대 (80년대에 대학에 다니고 1960년대에 태어났던 사람들, 주로 1980년대에 민주화와 관련된 학생운동을 겪었던 세대)" 사이에서 굉장히 큰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긴 하였으나 대통령에 취임 후 경제와 외교분야에서 열악한 실적을 보였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역사에 있어서 낮은성적을 기록했던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무현이 대통령이었을 기간에 한국과 미국사이에 적지않은 마찰이 있었고, "콘돌리자 라이스" 및 "로버트 게이츠" 와 같은 전 미국의 "부시 대통령" 행정부 관리들은 그들의 회고록에서 노무현이 반미 (反美) 인 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친북주의에 해당하는 외교를 펼친결과, 다른 국가들 사이의 신뢰성 저하에 기여했다는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퇴임 후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갔고, 농업 및 자연과 관련된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는 등 평범한 시민으로써의 삶을 지내면서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며 건강한 온라인 토론을 장려하기 위해 "민주주의  2.0" 이라는 웹 사이트를 개설하여 대중들과 소통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유년.

1945년 8월 15일 한국이일제의 강점에서 광복을 맞이했었던 다음해인 1946년 9월 1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3남 2녀중 막내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노무현은 1950년 즈음 경남 김해의 진영읍에 (봉하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위치해있는 한 국민학교 (현 진영대창 초등학교) 에 입학하여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재학 중 가난했던 본인의 집안을 돕기위해 학교에 결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성적은 우수했고 6학년이 되던 즈음엔 학생회장까지 도맡아 교내를 이끌어 가기도 했습니다.

이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진영읍 내에 위치해있는 중학교 (현 진영 중학교) 에 1959년 즈음 입학하여 중학생으로써 학업을 이어가던 중 교내에서 제 4대 정, 부통령 선거를 앞둔 당시의 집권자였던 이승만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작문대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에 평소에도 독재자의 이미지와 더불어 "3.15 부정선거" 등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탐탁지 않아했던 노무현은 일명 "백지동맹 (시험칠때 학생들이 사전에 모의해서 아무것도 쓰지않은 빈 답안지를 내는 행동)" 을 주도하게 되지만 이를 계기로 정학을 당하기도 하면서 덮친격으로 집안 형편까지 나빠지자 결국 휴학까지 하게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가난 및 이른나이부터의 한차례 굴곡에도 어찌됐든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이후 1963년 즈음 부산에 위치해있는 고등학교 (현 개성 고등학교) 에 입학하여 3년간의 교육과정을 모두 수료하면서 굴곡졌던 중학생때와는 달리 1966년이 되던해에 노무현은 무탈 (?) 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참고로 가난했던 개인의 집안사정으로 인해서 유년시절은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도 노무현은 다소 삐뚤어진 반항아의 기질을 보였었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정확하진 않으니 추후 확인이 되면 수정해 놓겠습니다)

 

노무현 변호사.

고등학교 졸업후에 노무현은 대학교의 진학이 아닌, 농협에서 근무를 하기위해 입사시험에 응하지만 떨어지게 되고, 이후 어망을 만드는 한 회사에 들어가게되어 해당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사법고시를 위해 공부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니던 어망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노가다를 전전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던 중 1968년 즈음에 입대시기가 되어 군대에 입대를 하고, 육군 제 12사단 (을지부대) 에서 1971년에 만기제대를 합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권양숙 (현 아름다운봉하 재단법인의 이사장) 이라는 여성과 결혼함과 동시에 사법고시를 다시금 준비하여 시험을 치르게 되지만 세번이나 떨어지게 되고 낙방되는 과정 중 "노영현" 이라는 그의 형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덮친격으로 당시 노무현의 아버지마저 병약해졌고, 부인 및 아들의 생계 등 공부에만 몰두하기가 사실상 쉽지않은 상황속에서 작은 형 (노건평) 의 든든했던 뒷바라지로 인해 1975년 즈음 "고졸 출신" 이라는 굉장히 이례적인 타이틀로 제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당시 17회 합격자들 중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지만 얼마안가 판사직을 내려놓게 되고, 해당 직을 그만두던 해인 1978년 5월에 변호사를 개업하게 됩니다.

변호사로써의 노무현은 이때부터 부가 쌓이며서 부족하지않은 생활을 이어가게 되는데 그러던 와중, 1981년 즈음엔 이름있던 당시의 "김광일" 이라는 변호사의 요청으로 일명 "부림사건 (전두환 전대통령의 정권시절에 일어났던 사건, 한 독서모임이 반 국가단체의 찬양을 이유로 해당 모임과 관련된 학생 및 교사, 회사원 등이 영장없이 체포되어 고문 및 구타를 당한 사건)" 을 맡게되면서 고문으로 인해 처해진 학생들의 현실에 분노했고, 이를 계기로 노무현은 "인권 변호사" 로써의 활동을 하게되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이후 대한민국에서 12번째로 대통령직에 당선되어 현재 역임중인 문재인을 이때 만나서 부산에 법률사무소를 열어 함께 운영하기도 하는 등 본격적인 법률상담 및 각종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기도 하고, 경찰에 구속되기도 하면서 적지않은 굴곡을 겪게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정계.

재야 인권 변호사로써 활동을 이어가던 노무현은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이었던 김영삼 전대통령과의 인연으로 1988년 4월에 치러진 "제 13대 국회의원 선거" 에서 통일민주당의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같은 해 11월에 열린 일명 "5공 청문회 (각종 비리 및 5.18 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을 위해 열렸던 청문회, 전국적으로 티비를 통해 최초로 생중계)" 에서 그는 정치부패와 관련된 혐의를 "초선 의원"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뛰어난 언변으로 질의함과 동시에 퇴장하는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기도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면서 "청문회 스타" 로 거듭나기까지 합니다.

인권변호사 시절에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이후에도 서로 각별하게 지내면서 김영삼 전대통령의 지원 및 지지를 받기도 하지만 1990년에 일어났던 "3당 합당 (통일민주당, 민주정의당, 신 민주공화당, 세개의 당들이 통합하여 민주자유당 이라는 새로운 거대 여당이 탄생되었던 사건)" 이 선언되자 노무현은 "이의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합니다" 라는 말을 외치면서 본인을 정계에 입문시킨 각별하게 지냈던 김영삼 전대통령과 등을 돌리게되고 후에 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창당, 이 시기즈음의 노무현은 13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감에 따라 1992년 즈음인 제 14대 총선당선을 목표로 부산 동구지역에 출마하지만 한 언론사의 보도에 의해 부동산 투기 및 재산과 관련된 의혹을 받게되고 이러한 의혹들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4대 총선에서는 낙선을 합니다.

이후 1995년에는 부산시장 선거에도 출마하지만 다시금 패배의 고배를 마시기도 하고, 다음해인 1996년 제 15대 총선 (서울 종로구) 역시 출사표를 던지지만 이명박, 이종찬에 밀려 이 역시 떨어지고 맙니다. 떨어진 뒤 1998년 2월이 되던즈음 이명박 전대통령 (이 당시는 국회의원) 이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게 되고, 이로인해 15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치뤄진 결과로 노무현의 당선과 동시에 약 6년만에 노무현은 다시금 국회로 복귀하게 됩니다.

복귀 후 계속해서 정치활동을 이어가던 2000년 즈음, 16대 국회의원 선거당선을 목적으로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 의 소속으로써 후보로 출마해 유세를 다니게 되는데, 공천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노무현에게 유리했던 지역인 종로를 뒤로하고 지역주의의 선입견을 깨어보고자 하는 본인만의 의지로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김대중당의 딱지를 지닌 채 부산에 출마한 결과 석패하게 됩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실제로 노무현이 상대 후보보다 앞서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일명 "노사모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라는 팬클럽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떨어진 후 이듬해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에 장관으로 임명되어 장관직을 지내기도 합니다.

 

국민 경선제.

2001년 12월 노무현은 16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른바 "국민 경선제 (정당의 "후보자 지명" 을 당에 소속된 당 내의 사람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 라는 제도를 대통령 후보경선 과정중에 처음으로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만해도 새천년민주당 내의 노무현에 지지율은 상당히 미흡했고, 15대 대선때 "국민신당" 소속으로 출마를 했던, 당시 부동의 1인자로 수많은 지지를 받고있던 같은 당내의 "이인제 (전 국회의원)" 라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될것은 거의 확실시해 보였던 때였지만 노무현은 "영남은 물론이고 반드시 전국을 설득해 내겠다" 는 포부를 밝히면서 경선 초기에 약 2% 도 안되는 민주당 당내의 지지율을 가지고 제주도를 시작으로 (제주경선 3위) 울산, 광주 (1위) 등 16개의 시, 도를 돌며 4월 26일 서울경선을 끝으로 경선에 참가했던 같은 당 내의 쟁쟁했던 이른바 재야출신 잠룡들을 청문회 스타답게 놀라운 언변 및 호소력으로 노풍 (노무현 바람) 을 일으키며 제친결과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 내에서 16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선출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상대진영의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전 국회의원이자 전 국무총리)" 과 맞붙게 된 노무현은 대선기간 중 이른바 "민주세력 대통합론 (1987년 대선때 YS와 DJ가 갈라지면서 흩어졌던 세력을 원래대로 합치고자 했던 취지)" 을 다시금 거론하며 3당 합당사건 이후 등을 돌려왔던 김영삼 전대통령을 찾아가기도함과 동시에 민주당 내부의 분열을 겪기도 하고,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치던 중 상대진영인 한나라당 소속의 이회창 후보역시 대통령 당선을 위해 선거유세를 다니게 되는데 특히 이 시기는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터진 비리사건으로 인해 이회창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하는 등 한나라당으로 대세가 기울기도 하였으나 일명 "차떼기 (과거 한나라당에서 불법적으로 정치자금을 전달했던 사건, 대형트럭에 돈다발을 채워 한번에 넘겨받는 방식)" 등의 비리 및 15대 대통령 선거때 이미 한차례 불거졌던 아들의 병역과 관련된 재 의혹 등으로 인해 생각했던것만큼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조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은 흘러 2002년 12월 19일, 개표과정에서 초반에 이회창 후보가 우위를 점했으나 중반, 후반으로 갈수록 노무현이 이회창 후보를 굉장히 근소한 폭으로 좁히면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고, 그 결과 약 2% 라는 (57만) 득표차로 노무현은 이회창을 간신히 누르고 대한민국의 아홉번째 대통령에 당선되게 됩니다.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노무현은 온, 오프라인으로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본인이 이끄는 정부의 명칭을 "참여 정부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나아가 참여 민주주의로의 발전 및 국민주권, 시민주권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의미를 내포)" 로 확정한 뒤 국정의 원리와 목표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등등), 그리고 다수에 해당하는 사안들 (한반도 평화, 부패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발전,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등등) 을 국정과제로 삼고 출범을 하게 되지만 취임 2년차에 노무현 대통령은 한차례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일명 "노무현 대통령 탄핵 (대통령의 특정 정당의 지지발언에 대한 중립위반을 이유로 중앙선거 관리위원회 및 야당에서 추진한 탄핵소추안이 가결, 이로인해 약 60일간 대통령 직무수행이 정지)" 의 사태를 겪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민들의 거센분노 및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 등이 일어났고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기각함으로써 노무현은 다시금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게 되어 위기를 면하게 되는데 참고할점은 해당 탄핵사태로 인해 보수세력은 오히려 국민들에게 "우리손으로 뽑은 사람을 당신들이 왜 일방적으로 탄핵시키냐" 는 이유로 역풍을 맞게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나아가 2004년에 치러진 제 17대 총선에서는 진보세력이 과반수의 국회의석수를 차지하게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덧붙여 탄핵을 주도했던 정치인들 대부분이 정계에서 물러납니다)

대통령으로써의 업적을 몇가지 살펴보자면 우선 "동북아 역사재단 (일본 및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 설립, 남북 정상회담 개최, 어족자원의 복원에 대한 노력, "자이툰 부대 (평화 유지와 재건을 목적으로 파병된 대한민국 육군의 민사부대)" 를 이라크로 파병, "바보 노무현" 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정도로 서민적이었던 이미지의 대통령 등이 있고, 이와 반대로 부정적인 비판으로는 먼저 측근의 비리논란, 참여정부 5년동안에 상승했던 집값으로 인한 부동산정책 실패, 빈부격차와 소득 양극화의 심화, "황우석 사건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이 황우석 교수의 사이언스지 논문에서 사용된 난자의 출처에 대한 의문을 방송하면서 일어나게 된 사건)", 한일 정상회담에서 독도를 다케시마 (독도의 일본식 명칭) 로 발언, 일본 순방중에 가졌던 공개 인터뷰에서 김구선생에 했던 평가에 대한 논란 등이 있습니다.

 

퇴임 이후.

이명박 대통령을 후임으로 노무현 전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 기차를 타고 김해시에 있는 봉하마을로 돌아가게 되는데 해당 봉하마을에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평소 서민적인 이미지에 대한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을로 관광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일반 시민으로써의 삶을 살던 중 그의 부인과 자녀 등이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노무현 본인은 물론 측근들 및 부인까지 검찰수사를 받게되고,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라는 사람이 노무현의 가족 및 여러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수수한 사실, 이른바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이 터지자 이에대한 사과문을 본인의 홈페이지에 게시하기도 했으며 대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기까지 합니다.

해당 중앙수사부는 박연차가 가족에게 건넨 "640만 달러 (한화로 약 75억에 달하는 금액)" 에 대해서 추궁하자 "나는 몰랐던 일" 이라며 노무현은 부인했고 검찰은 미국에 있는 아들딸에게 외화를 송금한 사실을 추가적으로 확인, 선물로 받은 억대의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진술 등이 계속되면서 진실에 대한 서로간의 공방중에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은 본인의 컴퓨터에 유서를 남긴 채 부엉이 바위가 있는 뒷산에 올라 스스로 투신함으로써 향년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마무리 하며.

오랜만에 뵙습니다. 필자가 하고있는 본업이 딱히 바쁜일은 아닌데 이것저것 할게 많네요.. 글쓰기에 조금 소홀했던것 같습니다. 아무튼 해당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정리하면서 느낀점은 우선, 본인이 불의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그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 와 같은 이미지로 필자에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부림사건을 이후로 노무현의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었다고 하고, 또한 군부독재에 대한 시위에 참가해 연설하던 중, 최루탄을 맞고 기절하는 일까지 겪었지만 계속해서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연설을 이어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 방송 3사를 통해 생중계 되었던 권위적인 대통령이 아닌 토론하는 대통령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일명 "대통령과 검사들과의 대화" 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가졌다는 부분에서 흥미를 느꼈고 (feat: 이쯤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 역대 대통령 중 "최초" 라는 타이틀이 제일 많이 붙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집중을 했습니다. (국민 경선제 및 탄핵, 정치인 팬클럽, 고졸 타이틀로 사법시험 합격 등등)

하지만 이런 정의의 사도, 서민 대통령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대통령 집권당시 대일관계는 물론 대미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다 라고 나와있고, 특히 2007년 9월 호주에서 열린 경제협력 정상회담에서 노무현은 부시 대통령에게 "평화조약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해달라" 고 한번이 아닌 여러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자 부시 대통령이 해당 노무현 대통령을 불편해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합니다. 또한 여러 자료들을 보던 중,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방한계선인 NLL 에 대한 노무현 전대통령의 "포기 발언" 의 자료도 있었습니다만 옳고 그름의 주장들이 뒤섞여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설왕설래로 인해 업적부분에 따로 포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뇌물수수.. 실제로 그가 당선후에 했던 말은 "지금까지의 청탁문화는 밑져야 본전이었는데, 그것으로는 청탁문화를 근절 할 수 없었습니다! 걸리면 패가 망신으로.." 어찌보면 "청렴" 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참여 정부" 의 친인척 및 측근비리 등으로 법정에 서기도 하면서 본인을 지지했던 사람들에 실망감을 안겨준 사례가 아니었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도덕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온 사람이었을텐데 라는 마음이 드는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글이 더 길어질것 같아 이만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어찌됐든 그가 꿈꾸던 세상은 "사람사는 세상" 이었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 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그의 모습을 보시는 분들이 장점은 장점대로, 단점은 단점대로 각자 판단을 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걸로 알고있습니다. 빗길운전 조심하시고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