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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이명박 편)

이명박.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고있던 시기 (1910∼1945) 인 1941년 12월 19일, 일본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오사카에서 당시 목장일이 업이었던 아버지 "이충우" 와 어머니 "채태원" 사이에서 4남 3녀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명박은 그가 5살이 되던 즈음인 1945년에 일본군의 항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러졌던 전쟁)" 이 종심됨에 따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하자 그해 이명박의 가족들은 경북 영일 흥해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라는 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의 집안형편은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알려져 있고, 덮친격으로 이후에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해 가정형편이 더욱 더 어려워지게된 이명박은 어머니의 잔심부름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의 목장일은 물론, 한창 공부를 해야할 나이에 학업을 이어가면서도 풀빵장사, 김밥판매 등을 병행하며 가난의 수렁에서 벗어나는데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6.25 전쟁의 피해로 인해 이명박의 누나인 "이귀애" 씨와 동생인 "이상필" 씨가 해당 전쟁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그렇게 포항 영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항 중학교에 진학 후 1957년에 졸업한 이명박은 집안의 생계를 이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의견으로 인해 고등학교 진학이 불가능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으나 당시의 중학교 담임교사에 권고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포항 동지상고 (현 동지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하게 되고, 뻥튀기 장사와 과일 판매를 병행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들이게 됩니다. (참고할점은 재학시절에 수재라 불릴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알려져있는 이명박은 중학교를 졸업 후에도 공부가 너무 하고싶었던 나머지, 일과 영어공부 두마리의 토끼를 다잡기위해 직접 "미군부대" 를 무작정 찾아갔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일당을 받는 소위 "노가다" 판에 들어가 일과 공부를 병행한 결과 고려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입학한 후에도 빈곤한 삶은 나아지지 않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며 등록금을 마련하지만 도중에 그가 대학교 3학년때인 1964년에는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6.3 학생시위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당시 이명박은 "학생회장" 이었습니다)

그 결과 시위 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하기도 하면서 이후 학생운동 경력으로인해 취업길이 막히자 이명박은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호소 및 설득력 (?) 을 포함한 내용의 편지를 쓰게되고, 이에 청와대로부터 "취업에 있어서 이명박의 과거 (시위 경력) 를 문제삼지 않겠다" 라는 답변을 받아내어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본격적인 기업인으로써의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기업인 및 초선 의원.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후부터 이명박은 약 12년만인 서른중반의 나이에 한국 역사상 최연소 사장이 되는 등 (참고로 "사장 임명" 을 이명박은 몇 차례 거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말그대로 사내에서 초고속 승진 및 출세를 하게되고, 그의 나이 40중반 즈음엔 "회장" 의 직위에 오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초고속 승진에는 많은 동료들과 선후배의 시기질투 등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정중에는 동료들은 둘째치고 회사 선배들이나 특히 본인을 면접했던 상급자가 이명박의 밑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등, 이러한 웃지못할 일도 겪었다고 나와있지만 근무시간을 제외하고는 사적으로나 밖에서 만큼은 예전 상사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노력을 많이했다 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회장으로써 이명박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이어나갔고, 이라크에 화력발전소를 건설, 말레이시아에 페낭대교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해당 국가와 각별한 인연을 맺기도 하는 등 해외사업에 주력하기도 하지만 1980년대에 일어났던 이란과 이라크간의 전쟁으로 인해 현대건설 및 이명박은 위기를 맞기도 하고, 나아가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리면서 적지않은 난항을 겪게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2년 즈음에 "정주영 (현대그룹의 창업자이자 초대 명예회장)" 이라는 사람이 정치계에 입문하고 대통령 후보에 도전함과 동시에 이명박은 현대를 떠나게 되고,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주영과 더불어 이명박 역시 정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당시에 정주영 회장의 정계진출을 이명박은 여러가지 이유 (재벌이 권력을 가졌을때 우려되는 부작용 등) 에서 수차례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막지못했고, 훗날 본인의 후일담에서 "처음 이런 얘기를 하지만, 정말 죽기살기로 정주영 회장의 정계진출을 말렸으면 어땠을까.. 막았더라면 그의 말년 생애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내가 온몸을 던져 말릴생각을 하지않고 ‘안되면 헤어져야겠다’ 는 생각을 먼저 해버린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그 후에 해보는데, 다 부질없고 아무튼 견해가 달랐던 거지요" 라고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섭섭함을 회상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은 이후에도 정주영 회장의 생일날에 직접가서 만나기도 하고, 정주영의 몸이 불편해 몸져 누웠을때도 문안을 가서 병세를 위안하기도 했다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초선의원으로써 국회의원 생활을 이어갔고 임기가 끝나갈때쯤 15대 총선에서 두번째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지만 그의 측근이었던 사람이 일련의 사유 (진급에 관한) 로 인해 기자회견을 열어 총선기간에 이명박 캠프의 선거비용과 관련하여 (대략 "법정 선거비용" 이 초과했다는 내용) 폭로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고, 이로인해 이명박은 수백만원의 벌금형과 동시에 "피 선거권 (선거에 후보로써 출마할 수 있는 일종의 권리)" 이 박탈되기도 했지만 2000년 8월 15일날에 일명 "광복절 특사" 로 사면되면서 선거권을 되찾아 2002년 즈음에 서울시장에 당선되게 되고, 이후 이명박은 국회의원이 아닌 시장으로써의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서울시장.

서울특별시장 재임당시 업적 중 몇가지 살펴보자면 우선 "청계천 복원" 사업인데, 본래 예전부터 자연적으로 흐르던 하천이었고, 조선시대때 부터 하천의 바닥을 넓히고 둑을 쌓는 등 여러 공사들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 (약 1970년대) "청계 고가" 라는 도로가 만들어지게 되지만 1990년대쯤 부터 구조물의 노후로 인한 안전상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을때 당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청계천 복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결과, 2005년 10월 즈음에 청계천의 복원사업을 완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과정중에 주변 상인들 및 진보성향의 단체, 언론 등에서 숱한 반대들이 있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 사업이 차질없이 이뤄질 수 있도록 고통을 감내해준 상인과 노점상에게 공을 돌렸고, "불편을 참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신 천만 시민들에 감사를 더합니다" 라는 기념식과 동시에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속의 오아시스를 만들어 이후에 평균적으로 약 1천만여명 이상의 외국인 및 내국인이 방문하게되는 관광 코스로 자리잡게되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합니다.

이로인해 대기질 개선 및 소음감소, 특히 "도시 열섬 (일명 히트 아일랜드, 즉 도시 지역에서 나타나는 평균 온도의 상승 현상)" 의 약화, 해당 사업으로 인해 당시의 서울시가 "국제 건축 최우수상", "토목 환경상" 등을 수상하는 등, 현재까지도 환경적인 면에서나 기타 여러 이점이 있는 청계천 복원사업의 업적이 있고, "대중교통 체계의 개선" 이라는 업적이 있는데 해당 개편의 취지는 승용차량을 줄여 배기가스를 낮추고, 대중교통의 활성화 및 서민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있어 들어가는 주머니 사정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의 목표가 담겨져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해당 사업으로 인해 대중교통을 체계적으로 전면 개편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대중교통이 원활해 지면서 동시에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도 늘어나는 등 후에는 대중교통협회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의 해당 사업을 우수정책으로 인정하기도 하고, 나아가 미국의 주간지인 타임즈에서는 환경에 이바지한 공으로 이명박을 환경영웅 중에 한명으로 선정하기까지 했으나, 개편 초기에는 시민들이 혼란을 경험하기도 하는 등 (노선변경의 제대로된 알림 및 교통카드 단말기들의 오작동 등) 다소 난항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본래 경마장과 골프장이 있던 부지 (뚝섬) 를 친환경 생태공원인 서울숲으로 조성, 서울시청 앞에 잔디광장을 조성 (겨울에는 해당 잔디광장이 스케이트장으로 변모) 등의 업적이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 을 슬로건으로 당시 같은 당내의 박근혜, 홍준표 등을 누르고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대회)" 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한나라당에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고, 그가 서울시장이었을때 이루어 놓았던 업적 등에 힘입어 초반부터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도중에 "BBK 사건 (15대 총선때 이명박 자신의 측근 비서관이던 '김유찬' 이라는 사람의 일명 '이명박 캠프의 자금 초과' 에 대한 폭로로 인해 이명박은 재판을 받게되고, 이로인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미국에 체류 후 한국으로 돌아와 금융사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BBK 라는 투자회사의 대표였던 '김경준' 이라는 사람과 공동으로 'LKe 뱅크' 라는 회사를 설립, 수십억에 달하는 투자금액 및 각종 위조된 보고서 등으로 인해 김경준과 이명박은 공동으로 대표직을 사임, 이후 김경준은 '옵셔널 벤처' 라는 회사를 인수하고 주가를 조작하여 부당이득을 편취하는 일이 발생하게되고 과정중에 이명박 본인이 수십억에 달하는 투자한 금액손해를 이유로 공동대표였던 김경준을 소송하는 등 이러한 주가조작 의혹에 이명박이 실 소유주로 연루되어 특검까지 이뤄졌던 사건)" 에 대한 연루의혹, 같은 당내의 이회창 총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하는 등의 여파로 인해 이명박의 지지율은 영향을 받게되고 덮친격으로 대선기간중에 김경준이 귀국함으로써 그의 지지율은 더욱 하락하기도 했지만 실소유주와 관련된 의혹이 모두 무혐의 결론이 나고, 적지않은 여러 난항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이변없이 높은 득표율로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열번째 대통령에 당선되게 됩니다.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이명박의 업적이 많은데, 우선 "대통령과의 대화" 라는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국민들의 의견을 듣고, "청계재단 (이명박 본인의 재산 수백억원으로 설립한 재단, 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 (소년소녀 가장 및 학생) 에게 장학하고 지급, 지원하는 목적)" 을 설립하여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 아시아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 "대청해전 (2009년 11월 북괴 경비정이 NLL 을 침범하여 일어났던 교전)" 당시 경고사격으로 북괴 경비정을 반파,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 추구, 한미관계 및 동맹 강화 (feat: 한국은 미국의 가장 친한친구 중 하나), 북한의 비핵화 및 "6자회담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반도 주변 6개국의 회담)" 재개에 관한 협력을 중국의 시진핑과 협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국내 최초도입, '이명박 정부' 때 서울 집값의 상승률은 약 -13% 였는데 '김대중 정부' 와 '노무현 정부' 때의 집값 상승률은 무려 73%, 94% 나 된다는것만 놓고 본다면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선방하며 집값을 안정시켰다는 것.

"747 성장 (7% 성장, 4만불 소득, 세계 7대 선진국)" 을 목표로 2010년 무역수지 흑자, 2010년 OECD 국가 중 가장높은 6% 대의 경제성장률 달성, 기업의 순이익 (실적) 역시 분기사상 최대치 달성, "아덴만 선원 구출 (대한민국의 선박이 소말리아 해적들에 피랍되어 무력전으로 제압하여 구출에 성공)" 등이있고, 2011년 1월 종합주가지수 2085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이후의 경제지표는 급속하게 악화, 물가상승 및 국민소득 연속 마이너스의 내리막길을 걸었고, 특히 미국산 소고기 수입 강행에 따른 대규모 시위, "명박산성 (대규모 촛불집회에 대비하기 위하여 컨테이너 박스를 용접해 광화문 도로를 막음)", 태극기 거꾸로 파문, 2008년 7월 11일 새벽 당시에 벌어졌던 일명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53세의 대한민국 국민인 '박왕자' 라는 사람이 북괴에 의해 피살되었던 사건)" 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침묵, 친 이명박계 독선 등으로 인해 최저치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퇴임 이후.

임기 말기에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써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는 등 박근혜 대통령을 후임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25일 공식적으로 퇴임하게 되지만, 여러 의혹 및 뇌물, 조세포탈 등으로 검찰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구치소에 수감되게 되고,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지만, 다스 실소유주와 관련하여 수백억원대 비자금 조성 혐의로 벌금 및 징역형을 선고받고, 2020년 2월 항소심 공판에서는 징역 17년으로 다시금 구속되어 재수감되지만 엿새만에 석방하게 되는 등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명박 전대통령의 퇴임 이후의 삶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던것 같습니다. (석방 후 이명박 전대통령의 근황을 알아보고자 이곳저곳 찾아보았지만 근황에 대한 정보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변동사항이 있을때마다 해당 문단에 내용을 계속해서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2020년 10월 29일, 이명박 전대통령의 '징역이 확정' 됐다는 기사를 금일 확인했습니다. 실형 확정의 주된 배경은 거액에 달하는 뇌물을 챙기고, 또한 대법원의 판결에서 다스의 실소유주를 사실상 이명박 전대통령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명박 전대통령은 17년의 징역이 확정됨과 동시에 '법치가 무너졌고,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 는 내용의 입장문을 냄과 동시에 '대법원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면서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 이라고 한탄하기도 했지만, 어찌됐든 항소심 직후 구속집행 정지로 자택에서만 줄곳 생활해 오던 이명박 전대통령은 징역형 및 130억원에 달하는 벌금, 57억 8천여만원에 해당하는 추징금이 선고되어 이틀정도의 신변정리를 한 뒤 구치소로 재수감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수년이 넘는 기간동안의 다스 실소유주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된것 같지만 '정치 보복' 이라는 의견들 또한 분분하더군요. 해당 내용과 관련하여 추가적인 내용들이 확인되면 해당 문단에 계속해서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무리 하며.

글을 작성하면서 필자도 오랜만에 이명박 전대통령의 재임기간이던 과거 2008년부터 2013년 사이를 되돌아 보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땐 지금처럼 '나라 걱정' 이라는것을 해본적없는 철없던 2, 30대 시절이더군요.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던 그때 그 시절과 지금이 오버랩 되면서 묘한 기분이 드는건 사실이지만 어찌됐든 해당 이명박 전대통령의 글을 써내려가면서 느낀점은 우선 시장재임 시절도 그렇고 이뤄놓은 업적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업적부분에 포함하진 않았지만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했던 말도많고 탈도많았던 일명 "4대강 정비사업" 에 관한것인데 2020년도인 현재에 역대급으로 긴 장마기간동안 홍수피해에 대해서 4대강 정비사업이 다시금 재조명 되는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필자의 입장으로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해 홍수의 피해가 그나마 일어나지 않았다는 쪽에 한표를 던지지만 여러 언론도 그렇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어서 업적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몰랐던 이명박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도 알게되어서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선 어릴적 너무나도 가난했던 나머지 흰 쌀밥에 달걀을 넣어서 간장에 비벼먹는게 최고의 음식으로 생각했다고 하고, 그마저도 못먹으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던지라 비싼 식당을 가도 제일먼저 달걀을 먹는다고 인터뷰했던 모 언론사의 자료에서 묘한 감정이 들었고,

그리고 본인의 "재산" 으로 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 했다는 내용을 보면서 필자는 감탄해 마지않았으며, 어린시절 장사를 많이했던 지라 상인 및 특히 노점상에 대해서 각별하게 비춰지는 그의 모습에서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는 들었습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업적 및 기타 추가자료가 더 있긴 하지만 글이 길어질까 이만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장마가 끝나니 태풍이 온다고 하고 코로나19 의 재격상에 이래저래 다사다난한 한해를 힘들지만 지혜롭게 굳건히 버티시길 바라겠고 정보를 찾는데 있어 도움되셨길 바라면서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