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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이승만 편)

이승만.

(출생 및 사망, 1875년 3월 26일~1965 7월 19일) 공식적인 재임기간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고, 초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써 해당 기간동안 역임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1894-95 "제 1차 중일전쟁 (또는 청일전쟁,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났던 전쟁)" 이 끝난 후 반일활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일련의 사건, 즉. 그 옛날 우리나라가 제국시절이던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또는 대한제국, 조선을 이어받은 한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이자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조약으로 인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멸망) 시민 단체활동을 하고 군주제를 없애며 민주주의를 이바지한 덕분에 1899년부터 다년간 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04년 즈음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도 하고, 해외에서의 기자회견, 인터뷰 등 외교활동을 이어가다가 후에는 학업,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한국으로 귀환하려 했지만 당시 이승만의 아버지에 귀국만류로 인해서 1913년즈음 하와이로 이주한 뒤 하와이 내에있는 한인학교의 원장이 되고, 교육활동 및 사업, 잡지출간 등을 하면서 해외에서의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후 1919년에서 1925년까지 일부 임시정부에서 여러 고위직으로 승진 및 대표로 활동하며 해당기간동안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에 대통령으로 임명되기도 하지만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의 거주, 독립운동가들과의 마찰 등으로인해 대통령직에서 파면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되자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환영회를 거쳐 정당 등을 결성하게되고, 신탁통치 (전쟁 등을 겪은나라의 안정화를 위해 타국에서 임시로 관리) 의 반대운동, 기타 저항운동 등을 거치면서 1948년 7월 20일, 김구를 꺾고 약 92.7% 의 투표율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게 되지만 취임후에는 권위주의, 부패, 학살 및 여러사건, 부정선거, 탄압 등 1950년대 후반까지 정치적 불안정과 대중의 반대가 커져가게 되고, 이후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에 이기붕을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개표조작을 함으로써 일어났던 시민 및 학생들의 시위)" 으로 인해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생애.

지금의 북한땅인 '황해도' 라는 곳의 한 시골마을 (대경리 능내동) 에서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은 세 형제 (그의 두 형제는 모두 어린시절에 병으로 요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중에 셋째였으며, 전염병으로 사망한 두명의 형과 달리 죽지않고 살아남은 사실상의 '외동 아들' 이었습니다. 본래 이승만의 아버지는 부유했지만 어찌된일인지 그가 젊었을적에 재산을 전부 다 써버렸다고 하고, 그의 어머니 역시 높은자리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져버리면서 동시에 이승만을 제외한 나머지 두 아들을 전염병으로 잃게되자 절망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참고할 점은, 본래 이승만의 조상이 왕이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만 (양녕대군 16대손, 즉 조선시대 왕족의 손자) "6대조 (이승만의 아버지인 이경선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증, 고조 할아버지의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할아버지 이후 벼슬의 삶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아 가난하게 살게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승만은 태어난 후 여러차례 거처를 옮겨가며 유년시절부터 한문을 배웠고, 20살이 되던 해 당시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 (지금의 배재중, 고등학교)" 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특히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가인 서재필, 윤치호 등과 만나면서 '미국 유학' 에 관한 조언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던 1897년 7월 8일날 영어로만 연설을 하게되는데 그 실력이 실로 유창하여,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졸업 후, 이듬해의 이승만은 신문을 펴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같은 해 3월 즈음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한 집회의 연사로 참가하기도 하고, 또한 한국 최초의 일간지라고 알려져 있는 '매일신문' 을 창간하여 사장의 직위에 오르기도 하지만, 같은 해 11월 5일에는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의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게 되자, 독립회 간부들의 석방을 위한 농성을 벌이며 해당 간부들을 석방시키기도 하지만 이후의 이승만은 '황제는 연령이 많으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라고 쓰인 문구의 독립회 전단지를 배포하던것이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대한제국의 고종 (조선의 제 26대 마지막 국왕이면서 동시에 대한제국의 황제) 을 왕위에서 몰아내는 음모에 일조했다는 혐의로 체포되게 되고, "한성감옥 (현 서대문 형무소)" 에 갇히게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수감중에 감옥에서 빠져나가는데 성공하기도 하지만 다시금 붙잡혀 들어오기도 했고, 옥중에서 영어공부를 하면서 같은 죄수신분인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침과 동시에 종교를 전파하는 등의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04년 민영환, 한규설 등의 도움으로 인해 이승만은 감옥에서 특사로 석방되게 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투옥당시에 있었던 고문으로 인해 '안면 경련' 을 일으키는 후유증에 시달렸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외교 및 유학.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된 이승만은 이후 1904년 10월 즈음에 한 청년학원의 교장직에 취임하기도 하지만 미국으로 가기위해 곧 바로 사임하게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민영환 (독립운동가) 의 "밀서 (몰래 전달되는 임의의 내용이 적힌 종이 등)" 를 받게되는 이승만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당시 대한제국의 고종이 이승만과 대면을 원했지만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중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던 임금이자,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 며 거절하게 되고, 이후 일본을 거쳐 미국땅을 밟게되며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게 되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은 민영환의 밀서 (대한제국 독립에 관한 내용) 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알려져 있고, '적극적으로 돕겠다' 는 내용의 답변을 하지만, 외교적인 일이기도 하고 밀서의 형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출하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권유 및 당시 일본의 반대공작으로 인해 공식적인 '대한제국 독립청원' 접수에는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일명 "을사오적 (대한제국 당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행해졌던 체결)" 의 밀실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자, 민영환은 이에 동의하지않고 맞서서 저항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일이 발생하기도 하는 등, 이후에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의도적으로 넘긴것이라 판단했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 에 관해서 다시한번 생각을 하게됨과 동시에, 민영환에 의한 이승만의 밀사활동이 사실상 별 성과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돌연 미국에 남아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후 조지워싱턴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차례로 받게되지만 미국으로 이주 후 계속 머무르는 이 시기의 행보는 '유배' 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학교의 학비는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서 대신했다고 알려져 있고, 그의 당시에 사정을 이해했던 교수는 직접 대학교 측에 장학금등을 받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하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 즈음의 이승만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YMCA 교사 및 선교사로써 봉사를 하기도 하고, 1912년 즈음에는 다시금 미국으로 돌아가 이듬해인 1913년에 "박용만 (이승만이 교도소에서 수감시절 만났던 독립운동가)" 이라는 사람과 하와이에서 정착을 하기도 하는데, 과정중에는 학원 및 교회를 설립하고, 교육 및 잡지를 출판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으기에 집중하기도 하지만, 얼마 가지않아 이승만은 서로간의 생각에 차이로 인해 박용만과 틀어지게 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임시정부.

1919년 즈음에는 이승만이 중국의 지린성에 있는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평안북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방총리 및 인천의 임시정부에서는 총재로 임명되게 되지만 실제적으로 미국에 거주하고있던 이승만은 미국내에서 사무실을 열어 총리나 총재로써가 아닌 '대통령' 처럼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당시의 일본제국은 이승만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써 각 나라에 공문을 발송하기도 하고, '대통령 선언서' 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이에 이승만은 "프레지던트 (대통령)"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것은 총재를 대신할 영어단어가 '프레지던트' 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서는 해당 이승만의 '프레지던트' 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인해 당시의 "안창호 (독립운동가)" 는 이승만에게 '대통령처럼 행동하지 말라' 면서 서신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고 '행동에 있어 불일치함이 세상에 알려지게되면 독립운동에 방해 될 수 있으니 언급말라' 는 이승만의 대답이 있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어찌됐든 그해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제를 포함한 새롭게 개정된 내용의 헌법이 알려지게 되면서, 결국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게 됩니다.

하지만 총리 및 총재로 임명되었을 당시처럼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몸은 미국에 있는 상태였으므로 상하이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중국에 도착하게 되지만 일본제국에 의해 본인의 목에 현상금이 걸린 전단을 발견하고는 중국인처럼 옷을입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조용히 방문한 후 다시금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참고할 점은,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과의 적지않은 갈등이 있었다고도 나와있습니다) 상하이에 와서 자신의 직책을 직접 수행하지 않고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가며 임시정부 각료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같은 해 4월 즈음에는 이승만, 안창호 등 외교독립론자들이 "국제 연맹 ('제 1차 세계대전' 이 끝난뒤인 1920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우드로 윌슨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던 국제기구)" 이라는 당시의 국제기구에 '위임통치 청원' 을 했던일이 임시정부 내에 알려지자 박용만, 신채호 등 무장독립론자들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 을 이유로 이승만 등을 맹비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서, 1925년 3월 23일에 이승만은 결국 의회에서의 의결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에 이승만은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활발하게 홍보해 나가면서도 1920년대 후반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허덕이자 "김구 (독립운동가)" 의 자금요청을 포함, 이승만은 임시정부로 돈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1933년 초, 그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연맹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독일 신문사 인터뷰, 방송에서의 연설, 프랑스 신문에 독립운동 기사가 실리는 등의 시간을 거치며 탄핵당한지 약 8년만에 임시정부로 다시금 복귀하게 됩니다.

 

활동.

1934년 즈음의 이승만은 '프란체스카' 라는 오스트리아 (유럽) 출신의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게되고, 이후 함께 하와이로 건너가면서 동시에 임시정부의 외교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지만 1939년 즈음에 한국에서 지금의 서울 'YMCA' 에서 강연을 하다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경찰에 체포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와이로 갈 수 있었던 한 차례의 위기를 넘기게 되면서 이듬해인 1940년이 되던 즈음에는,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로부터 이승만은 외교와 관련된 위원장으로 또다시 발탁이 되고, 1942년에는 미국인들과 '한미협회' 를 만들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승만은 미국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허가해줄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일본제국에 의해 운영되었던 "경성방송국 (현 한국방송공사)" 에서 일명 '밀청 사건' 으로 알려진 독립운동을 이승만이 직접 미국에서 운영하는 방송사를 통해 당시 '태평양 전쟁' 에 대한 상황을 조선에 전파하며 전쟁 상황을 알렸고, 군사훈련에 관한 지원을 미국에 요청하는 등 한반도를 위한 지속적인 활동들을 하게됩니다. 이후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이승만은 서둘러 한국으로 귀국하려 했지만 한국으로 입국하는 과정들이 그리 순탄하지많은 않았습니다.

돌고돌아 결국에 이승만은 귀국에 성공하고, 현대를 살고있는 지금 이시점에서도 간간히 쓰여지고있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의 명언을 남기게 됩니다. 또한 1947년 즈음엔 "장덕수 (독립운동가)" 라는 사람이 암살된 사건과 관련하여 그 배후자로 김구가 지목이 되게 되면서,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시기를 거치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1948년 7월 20일에 실시되었던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등을 제치고 7월 24일,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게 되는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윤보선' 을 비서실장으로 두게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전쟁,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생하자 북한군은 본격적으로 한국을 침공하게 되었고, 38선의 모든 한국군의 저항은 단시간내에 북한의 공격에 압도되었습니다. 또한 6월 26일까지 북한의 조선인민군 (KPA) 이 서울을 점령할것이 분명해지자 당시의 이승만 정권에서는 북진을 할만한 군사적 능력이 없었고, 주한미군도 철수하여 국군은 병력, 장비, 등에서 매우 취약한 수준이던 상황에서, 대부분의 인사들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을 시작으로 목포, 대구, 부산 순으로 옮겨가며 서울도시를 떠나게 되지만, 이와는 반대로 당시 서울의 상황은 국군 전선이 무너짐은 물론 서울의 함락이 임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 및 서울을 사수했으며, 국민들은 안심하고 군인들은 열심히 싸워라' 라는 대통령의 방송과는 다르게,
돌연 북한군이 서울내에 침투하게 되고, 당시의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배신감 및 불신, 분노 등을 하면서 서울 시민들은 뒤늦은 도망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6월 28일이던 자정에 한국군은 북한군 및 전차 등이 서울로 침입하자 한강다리를 파괴하여 덩달아 도망가는 수천명의 시민들의 발이 묶여버리거나 사망하게 되는 등, 결국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는 참사를 맞이하고 맙니다. 점령된 기간동안의 서울은 그야말로 참혹했습니다. 북한군들은 서울 곳곳을 다니며 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렸고, 일명 반동이라 일컫는 자들을 잡아다가 공개적으로 총살 및 처형도 서슴없이 자행했으며 (소위 인민재판), 희생자중에는 청소년도 다수 포함되고 미군 또한 예외없이 처형당했습니다.

북한의 서울점령 기간동안 이승만은 부산에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낙동강을 따라 방어경계선을 만들게 되는데, 일련의 전투가 이어지게 되면서 이는 나중에 '낙동강 전투' 로 통칭되게 됩니다. 이같은 전쟁후에 여러부분에서 나타나게되는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부족해진 병사를 메꾸는 과정중에 드러난 부당행위들 (횡령 등), 특히 대표적인 사건중에 하나인 일명 "양민 학살사건 (공산당 척결을 목적으로 500여명을 총살)" 인데, 문제는 해당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것 등등의 여파가 있었습니다. 이후 1952년 즈음의 이승만은 본인의 재선을 위해 부산에서 행하였던 일명 "부산 정치파동 (전쟁 중 임시정부를 설립한 부산에서 일어났던 폭력을 동반한 국회의원을 구속 및 연행)" 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 라는 개헌을 통과시킨 뒤 두번째 대통령 선거에 다시금 당선되게 됩니다.

 

부정선거 및 퇴임.

세번째 대통령도 어렵지않게 당선이 되지만 (대통령 후보로 나온 '신익희' 라는 사람이 선거기간 중 사망) 집권 후반에는 '국가보안법' 에 대한 개정을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이며 추진하기도 하고, 나아가 1960년에 있었던 선거에서는 개표조작으로 인해 시위가 일어나게되며 결국 '4.19 혁명' 으로 인해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자진 하야하게 됩니다. 사퇴 후 그해 6월즈음 하와이로 떠나게 되는데, 떠날 당시 이승만은 미국으로 완전히 가버릴 생각은 아니었던지라 다시 돌아올 여지를 남겨두고 출국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귀국을 '장면' 등이 허가하지 않았고, 결국 "향수병 (멀리 있는것에 대한 그리움)" 에 걸리는 등 하와이에서의 망명생활을 이어가게 되는데, 덮친격으로 건강까지 나빠져 병원방문이 잦아지게 되었고, 이후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이승만 전대통령은 병원에서 서거하게 됩니다.

 

역사나 삼국에 관해 공부하는 덕택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연스럽게 역대 지도자들한테도 포커스가 맞춰지더군요. 하여 이번 주제부터는 역대 대한민국을 통치한 대통령들에 관하여 작성해볼까 합니다. 최대한 한눈에 알아보기쉽게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잘하든 못하든 욕먹는게 대통령이라는 말들이있죠. 직업으로치면 이것만큼 극한직업 또한 없는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입니다, 폭염에 유의하시고 덥고습한 날씨일수록 건강관리에 유념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정보를 찾는데있어 참고하시고 다음 대통령의 주제를 가지고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요 근래 작성했던것들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글이 연일 높게 조회가 되더군요, 내용적인 면에서나 다른 것에서나 너무도 부족한 글이었을텐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봐주시는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최대한 내용을 늘려 보았습니다. 해당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역시 엇갈리는게 사실이지만 '애국 지사' 였다는 사실은 부정 할 수 없을것이고, 특히나 해방 이전에 해외에서 했던 독립운동들은 '독립 운동가' 로써의 이승만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을 뒤로한 채 떠나고, 국민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말함과 동시에 한강다리 폭파를 강행하여 다수의 서울 시민들의 발이 묶여버리고, 사망할 수 밖에 없었던 사안은 필자 개인의 입장에서 다소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한강 인도교의 폭파는 이승만이 직접적으로 지시한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자료도 있어서 분노를 해야할지 안타까워 해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것 또한 사실입니다. 어찌됐든 해당 이승만편을 심도있게 다루느라 정작 다음 주제의 인물인 '노태우 대통령' 에 관한글은 아직 정리도 못해놓은 상태여서 몇일 걸릴것도 같지만 최대한 빠르게 공부하고 작성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겠고 남은 목요일, 금요일도 무사히 지나 이번 한주의 마무리도 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