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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박근혜 편)

박근혜.

북괴의 불법 남침으로 일어났던 "한국전쟁", 또는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까지 약 3년간 계속되었던 전쟁)" 기간중이던 1952년 2월 2일에 지금의 대구 중구 삼덕동에서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와 어머니 "육영수 (박정희 전 대통령 영부인)" 사이에서 당시 군인이던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박근혜는 이듬해인 1953년에 전쟁의 휴전협정이 맺어지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고, 이후 "장충국민학교 (현 장충초등학교)" 를 입학하게 되지만 그녀가 9살이던 1961년 5월 16일 그녀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 군인) 이 주도했던 "5.16 군사정변" 으로 인해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자, 평범했던 박근혜의 삶은 또래의 아이들과는 정 반대의 삶으로 펼쳐지게 되고, 해당 시점부터 교사출신인 그녀의 어머니 밑에서 활발했던 성격 역시 차분해지면서 이른나이부터 청와대에 입성, 청와대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참고로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점이 오히려 누가 될까봐 모든 언행이 매사 조심스러웠다고 하고, 청와대 입성 후 재학시절 동안은 눈에 안띄게 멀리서 경호원들이 실시간으로 박근혜를 수행했다 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큰 영애로서 부친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국가지도자의 모습을 몸에 익혀가면서 장충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명문으로 꼽히던 "성심여자중학교" 와 "성심여자고등학교" 를 거쳐 "서강 대학교" 의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당시 여성들에게는 흔치 않았던 "공과대학 (공학과 관련된 학문을 연구하는 종합대학교의 산하 단과대학)" 의 입학을 결심하게 된데는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나라의 앞날 및 여러 사회현안 등을 항상 접하고, 나아가 미래 성장동력과 관련하여 당시 전자산업에 굉장히 많은 주목을 했었기 때문에 (실제 2020년인 오늘날에도 IT 등 한국에서 전자산업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녀 역시 전자산업 분야에서 산업역군이 되기로 결심, 급속도로 발전하고있는 당시의 대한민국의 경제에 기여를 해보고자 마음먹게 되었으며 (공대와 관련하여 당시의 육영수 여사는 어머니로써 이공계를 택한 박근혜를 조금 안타까워 했다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나아가 아버지의 적극적인 찬성과 지지로 공학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1974년 즈음 서강대를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의 한 대학의 어학 연수과정에 입학하여 선생님을 목표로 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퍼스트 레이디.

프랑스 유학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같은해 1974년 8월 15일 저녁 7시,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유명을 달리하였고, 당시의 박근혜는 잠시 프랑스 남부를 수학여행하던 중, 빨리 귀국해야한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게되면서 곧바로 하숙집으로 도착, 미리 대기중이던 대사관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녀는 한 차례 좋지않은 예감을 받게 되었고 (대사관 사람들 역시 박근혜가 충격을 받을까 귀국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프랑스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내의 스탠드에 배치되어있는 신문 1면의 내용 (육영수 여사가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을 확인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비보를 접하게 된 박근혜는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육영수 여사의 사후에도 박정희 전대통령은 재혼을 하지않아 그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의 배우자 역할을 대행, 꿈을 꾸며 친구들과 어울려도 모자를 22살의 나이에 한 국가의 '퍼스트 레이디' 가 되면서 1974년 즈음부터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은 그녀는 곧 "새마을 운동 (근면, 협동 등을 기본정신으로 하며, 농촌의 근대화,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 및 의식개혁을 목표로 하는 운동)" 을 전개하고, 적극적인 활동 및 5년간의 퍼스트레이디 활동을 통해 그녀는 책임감뿐만 아니라 많은 외교훈련을 이때부터 쌓아가게 되지만, 1979년 10월 26일 육영수 여사에 이어 박정희 전대통령 마저 유명을 달리하게 되자 박근혜는 아버지의 9일장을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과 신당동의 사저로 되돌아 갑니다.

그렇게 1980년 즈음부터 영남대 이사장직과 함께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육영재단 (어린이들을 복지하기 위한 재단)"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최태민 (이후에 '국정농단 사태' 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는 '최순실' 의 아버지)" 이라는 사람도 육영재단에 합류하게 되고 박근혜와 최태민은 봉사단 단체를 조직 및 신문발행 등을 함께하며 박근혜는 평범한 시민으로 다시금 돌아가게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심란했던 마음을 달래고자 시작했던 일기쓰기와 사색, 독서, 문인협회 가입 등을 병행했다고 알려져 있고, 그녀의 나이 30대 후반부터는 중국어 공부도 혼자서 독학하다시피 시작했으며 40대가 되어서도 조용히 지내면서 이따금씩 정계입문에 대한 제안을 받음에도 거절하게 되지만 1997년에 발생한 "IMF 사태 (김영삼 전대통령 재임시절인 1997년 11월에 외화 보유고 관리 실패, 환율정책 실패, 금융기관의 부실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진 외환이 너무 부족해 국제 통화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사건)" 로 인해 47세의 늦은나이에 평범한 시민의 삶에서 다시금 정치인으로써의 박근혜로 정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정치인 박근혜.

그녀의 자서전에도 나와있는 문구를 인용하자면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자유롭게 지내고 싶었지만 나라가 이런 상황에서 그냥 두고본다면 훗날 나 자신에 대한 자책도 피하지 못할것 같다" 라고 회고했으며, 해당 결심으로 인해 그녀는 '정치인 박근혜' 로써의 길을 나아가게 되고, 1997년 12월 10일 대선 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통해 정치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15대 대선은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한나라당은 김대중 후보의 승리를 시인하게 되고, 이후에 열린 1998년 4월 2일, 한나라당의 운명이 걸렸다고 할만큼 중요했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이회창의 권유로 대구 달성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며 같은해 4월 8일, 국회의장 발언대에서 박근혜는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올바른 정치, 국민들과 함께하는 정치가 되도록 열과성을 다할 것" 이라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나라당은 당 내의 지도부와 관련한 전당대회에 들어갔고, 임명직이 아닌 선출직에 참여하여 경선 당일날 최병렬에 이어 2위에 올라 부총재로 당선되는 쾌거를 이루게 되면서 박근혜는 당 내에서 총재 1인의 정당직을 없애고 민주정당, 국민정당으로의 개혁 등을 외치게 됩니다. 하지만 2002년 2월 즈음에 확정된 당 지도체제의 변경과 대선후보의 경선방식, 즉 '당헌 개정안' 에서 박근혜 부총재가 요구했던 제왕적인 총재직 폐지 및 정당개혁 등이 제외되자 결국 28일날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거부하고 어떻게든 집권만 하겠다는 당의 이기적인 생각에 더 이상 동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한나라당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 말함과 동시에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게 되고, 이후 "한국미래연합" 이라는 정당을 창당, 같은 해 5월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당시의 국방위원장과 만나 1968년에 일어났던 일명 "북한 특수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 (feat: 김신조)" 했던 사건에 대해서 사과의 뜻을 받으며 단독으로 회담을 하기도 합니다.

한국미래연합 창단준비를 하던 중 다시금 한나라당의 입당과 관련한 이회창 후보의 입당제안을 받게되고, 당대당 형식의 합당을 조건으로 같은해 11월 즈음에 한국미래연합당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을 발표하게 되지만 당시의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나라당은 또다시 패배의 고배를 마시게 되고, 이후 2004년 4.15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지지도 마저 급락하게 되는데 이유인즉슨, 당시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 및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역풍으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말 그대로 급격하게 추락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풍 위기' 에도 박근혜는 굳건히 당내에서 입지를 쌓은 결과 한나라당의 '당 대표' 로써 자리매김을 하게되고, 여의도 공터에 천막당사를 열기도 하는 등 이후에 제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 확보라는 예상외의 선전을 하면서 (말그대로 가라앉아가는 한나라당을 박근혜가 수면위로 끌어올림) 이때부터 그녀의 영향력이 커져갔고, 차기 대권주자로 급 부상하게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피습 및 경쟁, 갈등.

2006년 5월 20일, 경기도 군포를 시작으로 인천과 김포를 돌면서 수도권만 무려 7군데에서 유세를 이어가야하는 빡빡한 일정중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그렇게 오전, 오후 내내 유세를 벌이게 되고, 저녁 6시 즈음에는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와 합류하여 강서구에서의 지원유세 및 마지막 유세장소인 서울 신촌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유세를 시작하려 했지만 시작을 하기도전에 "지충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에게 커터칼로 상해를 가한 사람의 이름이며 징역 10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2016년 5월 교도소에서 출소)" 라는 사람으로부터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해당 난동으로 인해 지충호는 현장에서 붙잡혀 경찰에 인계됨은 물론, 피습당시 박근혜는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본인도 피살로 인하여 이렇게 끝나나보다' 라고 생각을 했다고 하고, 상처가 워낙 깊어서 얼굴이 벌어져 양 손으로 얼굴을 잡고 있어도 좀처럼 추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테러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본인의 삶은 덤이고, 정치를 하면서 이루고 싶은 꿈이있으며 국민들에게 전부 바치면서 살겠다' 라는 본인의 생각을 모 방송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곧 다가올 대선에서의 유력한 예비후보로 떠오르며 대표로 있던 한나라당의 대표직을 내려놓고 대선 레이스에 돌입하며 동시에 '서울특별시장' 을 지내면서 이루어 놓았던 여러 업적등에 힘입어 초반부터 높은 지지율로 인기가 많았던 이명박 전대통령과 치열하게 경쟁해야했던 박근혜는 이명박의 비리,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제기하지만 2007년 8월 19일 한나라당 내의 대통령 후보경선에서 약 1.5% 라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게 되고, 경선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함으로써 화제가 되기도 하는 등, 그렇게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이때부터 한나라당 내에서는 일명 "친 이명박 계열" 과 "친 박근혜 계열" 로 나뉘어 갈등이 존재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2008년에 있었던 제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친이계인 이재오 등은 후보로써 "공천 (정당에서 선거에 출마할 당원을 공식적으로 추천하는 일)" 을 받게되고, 친박계인 정치인들은 대거 탈락이 되는 등 박근혜는 이러한 공정성 및 살생부에 관한 비판을 이어가며 서로간의 갈등은 더욱 더 확산되게 되고, 결국엔 역사상 유례없는 박근혜 개인의 이름을 사용한 "친박연대" 라는 정당을 창설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방선거 출마에 대한 같은 당 내의 후보를 지원하기도 하고, 당시의 한나라당 대표였던 "홍준표 (현 국회의원)" 가 일명 "디도스 (2011년 10월 26일 선관위 홈페이지에 디도스에 의한 공격이 있었고, 해당 범인은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수행비서였던 공현민. 당시에는 재보궐선거가 한창 이뤄지고있던 상황)" 파문으로 쇄신안을 발표 후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대표직을 사퇴하자 이에 박근혜는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2012년 4월에 있었던 제 19대 총선에서도 과반석을 차지하는 등, 당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국회의원으로써 여러 정치활동을 이어가던 중 2012년 7월 10일 "대한민국 제 18대 대통령 선거" 의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됩니다.

선언 후, 새누리당 제 1차 전당대회에서 "존경하는 당원 동지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기호 2번이었던 박근혜는 선거인단 투표수 약 7만여표, 여론조사 지지율 74.7%, 총 8만6천여의 득표수와 함께 최다득표를 획득하여 '18대 대통령 선거' 의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되게 되고, 대통령 후보에 등록함으로써 기호 1번을 차지하게된 박근혜는 대선기간 중인 2012년 11월 25일, 국회의원직 사퇴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어 대선에 패배할시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동시에 사직서까지 제출하여 '대선기간' 중에 의정활동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또한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했던 안철수 후보가 당시의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면서 사퇴하여 단일화를 이뤄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지지층의 계속되는 지지를 받으며 모든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고, 나아가 선관위가 주최했던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에서는 문자 그대로 '박근혜 vs 문재인, 이정희' 의 2:1 구도로, 2명이서 박근혜 1명을 상대로 했던 노골적인 공격 및 "저는 박근혜 후보를 반드시 떨어뜨릴 겁니다" 라는 당시 이정희의 발언으로 많은 시청자들이 눈쌀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박근혜는 이에 굴하지않고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았고, 선거 막바지엔 이정희 후보의 사퇴, 박근혜와 문재인의 양자대결 구도로 전환되기도 했지만 별다른 이변없이 약 108만 (3.6%p) 표차로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새누리당의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열한번째 대통령에 당선되게 됩니다.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아버지인 고(故) 박정희 전대통령에 이어 부녀 대통령이 탄생)

 

대통령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의 업적을 살펴보자면 우선, 한미동맹의 강화는 물론 미 의회의 본회의장에서 합동연설을 '영어' 로만 쉬지않고 30여분간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하는 내용 및 북핵문제, 한미 양국의 발전방향 등에 대해서 연설 (이로인해 한미 양국간의 동맹관계를 다시금 확인), 중국에 '국빈' 자격으로 방문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시 주석이 한중 정상회담을 가진것도 모자라 덤으로 시진핑이 직접 주최한 특별 오찬에 이틀 연속으로 초대되어 만찬을 하는 등 매우 이례적으로 전례없는 파격적인 환대를 받음 (feat: 펑리위안 퍼스트레이디 여사), 프랑스 대통령과 경제협력에 합의, 북한의 일방적인 남북 "불가침조약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침략하지 않을것을 약속)" 폐기발표 및 북한이 미사일과 핵탄두를 이용한 위협 등의 문제에도 단호하게 대응.

2008년 2월 방화로 인해 소실된 숭례문을 복원, 주한미군의 한강이북 주둔에 합의로 인계철선의 계속적인 유지, 일명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 환자가 국내서 처음으로 발생했을때 정부의 초기대응과 관련하여 부실하다는 지적이 쏟아지긴 했지만 휴가 기간에도 청와대에 머무르며 대응 (총 186명의 감염자 중에서 완치 145명, 사망 38명으로 이이상 진전되지 않고 38일만에 메르스 종료선언. feat: 메르스 사태는 박근혜 정부의 무능이 낳은 참사), 불평등 지수 감소, 소득 양극화의 개선, 주한미군이 대한민국 경상북도 성주군에 사드를 배치하도록 한 것, 국방부가 보고한 김정은 제거 (참수) 작전이 포함된 '핵미사일 대응태세' 에 승인, 방위사업비리와 관련한 합동수사단을 출범시키고 약 100일만에 약 2000억원 규모의 비리를 적발 후 23명을 기소, 박근혜 정부 들어서 일명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청탁금지법 또는 김영란법) 이 시행 됨, 전두환 전대통령의 일가가 형성한 비자금을 추징 및 검찰수사를 통해 800억원대에 이르는 재산을 압류.

2013년에 일어난 일명 "대한민국 원전비리 사건 (대한민국 원자력발전소의 부품 납품과정 중 품질기준에 미달하는 부품들이 시험성적서가 위조되어 수년이상 한국 수력원자력에 납품되어왔던 것이 2013년에 이르러서야 적발, 이로인해 발전소의 가동이 연기 및 중단되고 전력대란으로 일부 지역의 공장시설 역시 가동중단이 되었으며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특히 여름철에 냉방장치를 가동하지 못하는 피해를 보게 된 사건)" 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결과로 한전 전 부사장 및 고위당직자 등 20여명을 구속, 재벌기업 총수의 비리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와 재판, 북한의 대남 적화노선을 추종하면서 일명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통진당 국회의원이던 '이석기' 라는 사람이 '한반도 전쟁에 대비해 국가기간 시설의 파괴를 위한 준비를 하자' 라는 발언으로 검찰에 고발된 사건)" 으로 인해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을 이유로 통합진보당을 해산 등등의 업적이 많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 역시 상당 수 존재합니다.

 

부정적 평가 및 탄핵.

우선 "드레스덴 선언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발표한 대북 3대 제안)" 에 대한 북한의 맹비난 (feat: 흡수통일 논리 및 불순한 의도), 2013년 방미기간중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이라는 사람의 성추행 파문, 2016년 한국의 사드배치 발표에 대한 중국의 경제보복 (해당 사태로 인해 당시의 롯데그룹은 약 70억 4000만 위안 (한화로 약 1조 2000억원) 의 추정치에 피해를 입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의 발생으로 해경과 정부의 미흡했던 초기대응 (이로인해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일반인 등 300여명이 사망) 및 사고발생 3일 뒤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있는 진도체육관을 방문하게 되지만 고성과 욕설이 난무,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했던 "정윤회" 라는 사람이 정식지위 없이 비선실세로 국정에 개입한다는 의혹의 문건이 언론등에 유출, 대통령 취임 2년차에 청와대와 신촌 등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단이 살포됨, 메르스 사태로 인한 지지율의 지속적인 하락, 당 내의 인사들은 물론 국민들과의 소통의 부재, 1989년 무렵부터 최태민과 박근혜의 내연과 관련한 관계설이 시중에 나돌았고 나아가 숨겨둔 사생아도 있다는 의혹이 여러번 제기, 일명 "10.26 사태" 후 전두환 전대통령으로부터 받은 6억원에 대한 사실이 정치자금으로 논란 등등의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합니다만..

빼놓을 수 없는 전례없는 희대의 사태였던 일명 "최순실 게이트 (최순실이 박근혜 정부의 국정개입, 미르재단 및 K스포츠 재단의 설립에 관여하여 해당 재단을 사유화,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 등을 포함.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인생 전반을 최순실이 관여한것으로 의심, 대통령 취임이후 현재까지 모든 정책에 최순실이 관여한것으로 추측되고있고, 또한 이화여대는 정유라를 체육 특기생으로 부정입학 및 학사관리에 대한 소홀함이 청문회를 통해서 밝혀졌으며 여론은 날이갈수록 나빠졌고, 불만의 목소리들 역시 늘어나며 덮친격으로 세월호 사고에 대한 7시간의 의혹,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 국민들의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져 결국 2016년 12월 3일 각 정당의 의원들 170여명이 헌법과 법률위반으로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 을 국회에 발의, 12월 9일 가결됨에 따라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인용, 박근혜 대통령은 그렇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 현직 대통령이 탄핵이 되는 유례없는 불명예를 떠안게 된 사건)" 및 대기업 뇌물의혹 등으로 인해 임기중 최대의 위기에 몰리게 되고 덮친격으로 대통령 직무까지 정지되어 당시의 황교안 국무총리가 헌정사상 9번째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기까지 합니다. 결국은 헌재가 탄핵소추안을 인용하게 되고, 박근혜 전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파면을 당하게 됩니다.

 

파면.

그렇게 5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4년만에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사저로 복귀한 박근혜 전대통령은 이후 검찰의 소환지시에 따르며 조사를 받게되는데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에 대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는 등 방어권을 행사, 긴 시간동안의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결국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게 됩니다. 구속된 상태에서도 수사와 재판을 병행하게 되고, 제 21대 총선을 40여일 앞둔 시점에서는 수감중에 옥중서신을 전달, 약 한달 전에는 박근혜 전대통령의 특별사면에 대한 여부도 정치권에서 큰 화두였지만 관련절차가 진행중이지 않다는 점이 시사되기도 했고, 나아가 이복언니인 박재옥씨의 별세소식을 접했음에도 "귀휴 (복역중인 수감자가 일정기간 휴가를 얻어 외출한 뒤 복귀하는 제도)" 여부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사는 밝히지 않는 등, 2020년 9월인 현재까지도 수감기간만 약 42개월째에 접어들었으며, 어느 역대 대통령보다도 긴 수감생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복역이 진행중이므로 근황이란 단어는 일단 뒤로하고, 박근혜 전대통령에 대한 특이사항이 있을때마다 해당 문단에 내용을 계속해서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박근혜 전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특이사항은 아니지만 '세월호 참사 당시에 상황들이 담긴 선내영상이 "조작" 됐다는 정황이 확인되어 특검에 요청할것' 이라는 기사들을 하루전인 22일에 확인했습니다. 내용인즉슨 '해당 사고시점부터 모든 영상자료를 복구해놓은 데이터 중 하나의 섹터를 선정했는데 해당섹터의 영상재생이 안됐고, 그 이유는 주변부에 있는 섹터 하나를 그대로 복사해 붙였기 때문이며 혹시라도 프로그램상의 오류는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1년을 조사하면서 이 부분은 사람의 손을타거나 직접적인 조작을 하지않으면 이런현상이 일어날 수 없다' 입니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정황이라고 하니 혹 궁금하신 분들은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세월호 세글자만 검색해도 뉴스탭의 상단에 뜨니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무리 하며.

올해 6월 즈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글을 써내려 가다보니 벌써 열한번째 대통령까지 왔습니다. '벌써' 라는 단어선택이 무색하긴 합니다만.. (포스팅 텀이 길어도 일주일은 넘기지 말자라는 포부로 시작했지만 본업과 개인적인 것들을 병행하다보니 쉬운건 아니더군요) 각설하고, 해당 박근혜란 인물에 대해 정리하면서 느낀점은 우선 적지않은 많은 역경을 딛고,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그녀의 책에는 물론, 모 방송에서도 언급했던 '한 줌, 한 점. 결국 어떻게 살아가더라도 죽게되면 한 줌의 흙더미가 되고, 긴 역사에서 볼 때 자그마한 점 하나 찍고 가는것이다' 라는 대목에서 비추어 보면, 적어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찌됐든 '한 점이 아니라 한 획을 그은것이 아니었을까' 를 느끼게 되었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홉살이 되던 즈음의 1961년 당시, 소장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때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18년간의 청와대 생활을 시작하게되는 박근혜는 열심히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육영수 여사의 비보를 접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내에서는 그 충격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하고, 그 와중에도 혼자 남으신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걱정을 많이했다고 합니다. 한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것과는 반대로 특별할것이 없었다고 하고, 학창시절 친구들이 그녀의 집에 놀러와 방을 구경하는데 있어 '별다른게 없네' 라고 실망했다는 일화는 자료를 찾아보던 중, 내내 흥미로웠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업적 부분에 추가할까 말까를 고민했던 부분인데, 1979년 당시에 굶주렸던 북한과는 달리, 한국은 주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뤘다고 판단한 지미카터 미국 대통령은 '한국은 경제력으로나 기술력으로나 충분히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고 판단,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해서 미묘했던 시점이 1979년이었다고 하고,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여 박정희 전대통령과 자주국방, 인권유린 등의 다소 불편했던 논쟁을 서로간에 하던 중,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덕분에 주한미군 철수가 취소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자료가 있었습니다만 당시에 박근혜는 대통령이 아니었기에 업적에 포함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한가지는 '담배값 인상' 에 관한 부분인데, 2015년 당시 보건복지부가 담뱃값 인상과 동시에 흡연자들의 금연을 돕기위해 금연치료 지원사업을 시작하게 되고, 이로인해 금연 치료제 수요가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 해당 금연치료를 받을경우 12주간 6회 이내의 의료진 면담료와 금연치료용 CNS 의약품 또는 보조제 (패치, 껌, 사탕 등)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으며 또한 OECD 회원국의 담뱃값이 평균 7천원 (실제로 2015년을 기준으로 유럽 등 다른국가들의 담배가격은 평균 7~8천원 선이었고 심지어 영국의 담배가격은 무려 2만원 선) 인것에 비하면 한국의 담배가격은 그에 못 미치는것에 비해 '흡연율' 은 OECD 회원국 중 두번째로 높았던 나머지, 정부 못지않게 정치권은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현명한 금연정책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왔다' 고 말하며 시행했던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취지의 인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의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에서 '서민 호주머니 털어 세수부족 메우려는 꼼수' 를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를 했고, 국민들 역시 담뱃값이 인상되기 전, 사재기 열풍이 불면서 부작용이 속출했던 사례가 있어 업적에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박근혜 전대통령에 대한 업적이나 부정적 평가 등등에 관련된 자료들이 더 있긴 하지만 찾아서 봐주시는 분들이 한눈에 보셔야 하기에 가뜩이나 긴 글이 더 길어질까 이만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다음 대통령의 주제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기에는 아직, 현직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지 않은 관계로 해당 카테고리의 대통령에 관한 주제의 글 작성은 아마도 2년의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시점인 2022년 즈음이 되지않을까 짐작하고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고, 다른 주제의 글이나 다른 주제의 인물 등을 새롭게 포스팅하기에 앞서 앞전에 작성해 놓았던 글들을 전면 수정하는데 우선적인 집중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글도 계속해서 써봐야지 필력이란것이 느는가 봅니다. 예전에 작성했던 포스팅을 최근에 번호 1번인 글부터 2번, 3번의 글까지 차례대로 둘러봤는데 하루빨리 수정을 해야겠더군요 ^^; 개인 블로그다 보니 글쓰는것이 아닌 필자 개인의 본업과 이것저것 해야할것들이 맞물리면 글을 수정하는 텀이 길어질수도 있겠지만 될수있는한 빠르게 전면 수정을 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역대 대통령에 관한 부족한 글 꾸준히 봐주신 분들에게 그리고 앞으로도 봐주실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고, 다른주제의 글을 가지고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